[스포츠 속으로] 김우중 회장의 축구 사랑
[스포츠 속으로] 김우중 회장의 축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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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분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 그가 걸어온 삶과 시대를 되돌아본다. 한 인간의 죽음은 때로는 반면교사의 표본으로 삼기도 하고 본받을 만한 사표로 추앙하기도 한다. 지난 9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극명하게 평가가 엇갈린다. 한때 세계 18위의 기업 신화를 이룬 신화를 일군 샐러리맨의 영웅이었지만, 역대 최대 규모 부도를 내고 외환위기를 좌초한 실패한 기업인 이름에 올랐다.

체육언론인으로서 나는 김우중 회장이 경제인으로서보다는 축구 행정가이자 축구 경영인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았다. 당시는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스포츠가 종합 4위를 차지하고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올라섰고, 대우를 비롯한 재벌기업들이 고속성장을 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판을 만들 무렵이었다.

그가 국민스포츠인 축구의 행정 수장을 떠맡기로 한 것은 평소 축구에 대한 사랑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사원 축구대회에서 선수로 몸소 출전해 풀타임을 뛸 정도로 축구에 열성이었다. 1983년 국내 첫 프로축구인 슈퍼리그가 출범할 때, 부산 대우 로얄즈를 창단한 것은 그가 축구를 좋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대우 로얄즈는 다른 어느 프로구단보다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 회장은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으면서 특유의 추진력으로 축구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우그룹의 실력있는 직원들을 협회에 고정 배치하며 축구의 선진화, 과학화에 주력했다. 이재명 대우그룹 기조실장, 안종복 대우축구단 사무국장 등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축구협회로 보냈던 것은 축구협회 행정을 체계적으로 하기위해서였다. 축구협회장은 그가 창조적인 발상과 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에 딱 맞는 자리였다.

김 회장이 축구협회장 재임시절 한국 축구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보였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일본 축구가 동메달을 획득할 때, 일본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독일의 세계적인 지도자 크라머 감독을 주니어대표팀 감독으로 영입,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유소년 축구의 기틀을 탄탄히 다졌다. 해방이후 단절됐던 남북한 축구가 처음으로 교류를 한 것도 그가 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직후 한국축구대표팀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으로 가 북한 대표팀과 통일축구를 갖고 남북한이 한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한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평양 친선경기를 가질 때, 취재기자였던 나를 비롯한 기자단, 선수단과 함께 평양으로 직접 가기도 했다. 6.25 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터에 김 회장은 평양 안골체육촌, 능라도 경기장 등을 보면서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잠깐 회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축구협회장으로서 김 회장을 수년간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축구 사랑에 대한 그의 진정성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직후 안정환의 해외진출은 김 회장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일이었다. 안정환은 대우그룹 재단에서 운영하는 아주대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김 회장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아쉽게 물러난 것은 어떻게 보면 대우그룹이 망하면서 스폰서가 끊겼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열정을 불사르던 축구협회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러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그의 못다한 꿈은 다음 회장을 이어받은 같은 기업인 출신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 개최하고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 신화를 낳았기에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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