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황산성에서 바라본 전경
황산성에서 바라본 전경

멀리서 지켜보고 포기한 탄현

백제의 지방(擔魯) 성들은 신라 성에 비해 작은 규모로 쌓아졌다. 주로 퇴메식 성이 많으며 신라 성이나 고구려 성에 비해 규모가 왜소하다. 신라 성들이 대부분 3천 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데 반해 300~500명 정도의 군사 밖에 두지 못했다. 그러니 탄현 부근을 지키던 군사들의 수효가 많아도 수천에 불과했을 게다. 이들이 5만 대군의 진군을 막을 수 있었을까.

또한 백제는 당시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한강유역과 천안, 청주, 해안지역인 서부에 주력 군사들을 배치하였으므로 이들이 움직여 탄현까지 오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을 신라가 면밀히 계산하여 일시에 탄현을 넘고 황산벌로 진출한 것이다.

성충의 간언을 수용하여 백제 탄현에 2만~3만 대군의 병력을 진주시키고 기벌포에도 견고한 성을 구축, 많은 군사들을 주둔시켰다면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 수륙군의 상륙을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왕도 부여가 정복당하고 복국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십 여일 이내 많은 군사의 동원이 가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권제 44 열전 제4 흑치상지(黑齒常之) 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자 흑치상지의 부하들은 항복했으나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장방이 노왕을 가두고 군사를 사방으로 내어 크게 침략하므로 흑치상지는 좌우 추장 10여 명과 함께 도망하여 무리를 불러 모아 임존산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10여 일이 못되어 그에게 모여드는 무리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 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城自固. 不旬日歸者三萬云云).”

즉 10일이 안 돼 백제 서부지역에 있는 임존성으로 3만여 명의 군사들이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존성에 모인 백제 복국군들은 나당연합군의 끈질긴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다. 복국군을 지휘한 백제 마지막 왕 풍왕이 주류성(周留城)에서 패하여 고구려로 탈출한 후에도 이들의 항쟁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탄현 고지도
탄현 고지도

신라 대군 공격로 새로운 추정

백제를 공격한 신라 5만대군의 출발지는 어디였을까. 아무래도 주력부대는 왕도 서라벌에서 떠난 근왕군(勤王軍) 일부와 사벌주(지금 상주)군이 주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는 처음에는 나라의 가장 위쪽이라고 하여 상주(上州)로 불린 곳이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9주 5소경의 한 주(州)가 됐다. 김유신 장군이 일시 도독으로 부임해 있으면서 군사들을 조련하여 전쟁 수행능력이 우수했다.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만난 김유신 장군과 제장들은 남하하여 상주에 와 있던 김춘추 태종 무열왕을 알현하고 지휘를 받는다. 당시 태종 무열왕은 백화산성(白華山城)에 임시 가궁(假宮)을 짓고 머물고 있었다. 왕은 몸이 불편하였던지 군사들과 행동은 같이 하지 못하고 전송만 했다. 김유신 장군을 선두로 신라대군은 서쪽 부여를 향해 진군했다. 이들은 황간을 지나 길동(吉同. 영동)-양산(陽山)으로 갔다. 양산은 일찍이 화랑 김흠운까지 희생시키며 확보한 최전방 전략 요새였다.

신라군은 이곳에서 금산 땅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금산 추부에서 옥천(관성군), 보은(삼년산성)에서 출발한 증원부대의 합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상정된다. 당시 옥천, 보은은 신라의 대 백제 공격의 주요한 요새로 전쟁 경험이 많은 정예 군사들이 주둔했던 요새였다.

신라군은 지금의 금산 군청소재지를 지나 추부-복수면 길을 따라 진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은 평지로 이곳을 지키던 백제군도 위세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복수면에서 지금의 에딘버러CC를 지나 벌곡으로 통하는 길은 길이 좁고 군사들의 행렬도 길 수밖에 없었다. 신라군은 여기서 탄현을 넘는다.

신라군이 진군하는 동안 백제 군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탄현 인근에는 작은 백제 토석축성들이 존재한다. 이 곳 성들은 고작 백제군 300~500명 정도를 주둔시킬 수 있는 작은 규모다. 백제 군사들은 황급히 왕도에 위급한 봉화를 올렸을 게다.

신라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탄현을 넘어 ‘벌곡’에 당도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일부 백제군의 저항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백제군은 부랴부랴 군사들을 벌곡에 집결시켜 신라대군을 저지하려 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신라 5만 대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이곳의 지명을 벌곡(伐谷)이라고 붙인 이유는 바로 신라군이 백제군을 격파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벌곡에서 연산으로 나가는 길은 비교적 험준한 천호산(天護山)을 넘어야 한다. 백제는 하늘이 돕는다는 천호산 고개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천호산을 넘은 신라대군은 지금의 연산평야에 진출하여 진을 구축하였다. 백제는 계백이 급히 모은 5000명의 군사들이 산을 의지해 진을 구축했다. 여기서 신라 백제의 최후 결전이 벌어진 것이다.

황산성 성벽의 흔적
황산성 성벽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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