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신라 김유신군 공격로 추정, 역사의 교훈 체험

5천결사대의 영혼이 잠든 황산성에서 찾아진 연화문와당

황산성에서 바라본 연산면 마을의 모습
황산성에서 바라본 연산면 마을의 모습

충신 성충이 간언한 방어 요새

‘탄현(炭峴)’은 백제 멸망의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탄현은 우리말 ‘숯 고개’의 한자 표기로 왕도 부여의 외곽을 가로막은 험준한 고개이자 요충이었다. 백제 의자왕은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지 못하고 황산벌에 진을 쳤다. 방어군을 지휘했던 장군 계백은 고대 중국 구천(句踐)의 고사를 예로 들며 승리를 호소했다. 그러나 신라 정예 5만대군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계백은 여러 번 조우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5000명의 결사대를 잃었다. 그것이 백제 최후 황산벌 전투였다.

탄현의 철통같은 방어를 주장한 이는 백제 충신으로 기록되는 성충(成忠)과 흥수(興首)였다. 이들은 의자왕이 주색으로 빠지자 간언을 하다가 귀양을 갔다. 성충은 귀양을 간 자리에서도 왕에게 탄현의 중요성을 고언 한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16년조(656)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 혹은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 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王荒淫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 極諫 王怒囚之獄中. 成忠不食 瘦死臨終上書曰 ‘忠臣 死不忘君 願一 言而死. 臣 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 兵必審擇其他.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 不使過沈峴(炭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云云.)”

탄현은 이렇듯 백제 방어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으나 의자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신라군이 왕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탄현을 넘었다. 의자왕은 성충의 간언을 무시한 것을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백제 운명을 바꾼 탄현은 어디일까

전국에는 탄현이란 명칭의 고개가 많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충남 공주와 부여 그리고 전북 완주군에 속한 고적 조에 3군데나 지명이 남아 있다. 또 경기도 송탄시의 한복판에는 지금도 탄현이란 이름이 남아 있다. 이것은 바로 송탄(松炭)이 숯 고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렇듯 <삼국사기> 탄현의 위치에 대한 비정은 백가쟁명(百家爭鳴)한 실정이다. 그중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의 ‘숯 고개(탄치, 炭峙)’, 금산군 진산면 방현리와 행정리 사이의 방현(方峴), 대전시 동구와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의 마도령(馬道嶺),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에 있는 쑥고개 등이 지목되고 있다.

충북지역 고적 조사를 수십 년간 해왔던 고 정영호(전 단국대박물관장) 박사의 <김유신의 백제 공격로 연구>에 따르면 신라군은 삼년산성(三年山城, 보은군 보은읍 성주리) - 산계리(山桂里 ) 토성(옥천군 청성면 면사무소 건너편) - 장군재(옥천군 청성면 소서리) - 구진베루(옥천군 옥천읍 월전리) - 군서(郡西, 옥천군 군서면) - 마산(馬山, 충남 금산) - 炭峴(탄현)을 거쳐 황산벌로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고 정영호 박사는 실제로 백제 공격로를 답사하면서 탄현을 조사했다는 점에서 노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신라대군이 택한 길은 상주에서 영동 황간을 거쳐 양산에서 금산 추부를 지나 탄현을 넘는 코스로 생각되고 있다. 물론 보은과 옥천 군사들은 정 박사의 주장대로 이 길을 택해 금산에서 신라대군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연산천에서 바라본 관동리 일대. 신라 화랑 관창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연산천에서 바라본 관동리 일대. 신라 화랑 관창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탄현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

탄현(炭峴)은 백제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구축한 요충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동성왕 23년(501) ‘7월 탄현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七月 於 設柵於 炭峴 以備新羅)’고 기록된다. 동성왕은 신라에 청혼하여 부인을 신라왕녀로 삼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요충인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는 등 방어에 주력한 것이다. 이때만해도 백제는 고구려가 살수원(薩水原. 지금의 괴산 청천)을 통해 신라를 공격하려하자 원군을 보내 돕기도 했다.

탄현은 성충 기사에 이어 의자왕 20(660)년 기록에도 나온다. 나당연합군의 대군이 왕도를 향해 진격해 오는 순간 의자왕은 황급히 중신회의를 열었다. 이때 탄현과 기벌포의 방어 전략이 다시 등장했다. 여기에 올바른 소리를 하다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을 가 있던 좌평 흥수(興首)의 간언이 나오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 일연산사(一然禪師)의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 춘추공 조에 흥수 기록이 보인다. 이 중에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자.

(전략)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니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시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싸우게 하였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신(群臣)을 모아놓고 싸워서 막아낼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의 직(義直)이 아뢰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지만 물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 군사는 대국(大國)의 원조만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사람의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겁을 내 감히 날카롭게 달려들지 못할 것이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왔으므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신라 군사는 우리에게 여러 번 패전했으므로 지금 우리의 군세(軍勢)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가 피로해질 때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한 부대로써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접전하면 군사는 온전히 살리고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주저하여 누구의 말을 따를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가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 있었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 묻기를 “사세가 위급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기를 “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대신들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가 옥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와 강을 따라 내려오게 하되, 배 두 척이 나란히 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에 올라와 지름길을 밟되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함이 좋을 것이니 이때 군사를 놓아 적군을 치면 마치 조롱 속의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고 하였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죽기를 각오한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4번 접전하여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은 전사하였다. (하략)

(원문) 定方引兵 自城山濟海 至國西德勿島 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義慈王聞之 會群臣問戰守之 計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不習水 羅人恃大國之援 有輕敵之心 若見唐人失利 必疑懼而不敢銳進 故 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 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師老 先使偏師擊羅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全軍而 保國矣 王猶預不知所從 時佐平興首 得罪流竄于古馬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何 首曰 大槪如佐平成 忠之說 大臣等不信曰 興首在縲絏之中 怨君而不愛國矣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卽伎伐浦] 沿流 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竝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如在籠之雞 罹網之魚也 王曰 然 又聞唐羅 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偕伯 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然兵寡力盡 竟敗而偕伯死之云云.

백제 멸망 4년 전 성충의 간언을 수용하여 신라와 당군의 침공을 철저히 했다면 백제는 혹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라대군의 진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백제군은 많은 군사들을 보고 위세에 눌려 대항하지 못했다. 물론 탄현에도 목책을 세우고 주변의 여러 방어성에 군사들이 있었지만 신라군의 진군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탄현으로 추정되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숯 고개
탄현으로 추정되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숯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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