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2006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제작한 태평양전쟁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군의 시각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개인들의 아픔을 전해줘 큰 감동을 주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태평양 전쟁 말기,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일본군인들은 사지로 내몰리며 목숨을 잃었다. 당시 죽은 수많은 일본군 희생자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있었다. 1932년 LA올림픽 승마 개인마술 장애물종목에서 우승한 니시 다케이치 남작(1902~1945년 3월2일)이다. 승마 역사상 동양인으로서는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니시 남작은 태평양 전쟁에 참전,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서 다시 만나자”며 죽기 마지막까지 싸웠다. 그의 생명만은 구하기 위해 미군들은 전쟁 전 그와 친했던 미군 대령을 불러, 투항을 권유했으나 끝내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집단 자결로 삶을 마무리했다는 후문이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화로 남았다. 서양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승마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니시 남작은 전쟁에서 전사함으로써 영예로운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승마에서 서양 백인들을 꺾고 올림픽 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아버지의 권력과 재력으로 남작 지위를 승계 받았지만 그가 승마선수로 성공하기까지는 국가적인 후원이 뒷받침됐다.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해 기병장교가 된 니시 남작은 이탈리아에서 명마를 구해, 체계적으로 조련을 해 서양 귀족들이 큰 소리치던 승마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는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내년 2020 도쿄올림픽을 맞아 일본 제일주의로 질주하려는 아베 수상에게 니시 남작만큼 올림픽의 관심을 극대화시키는데 적합한 인물은 없을 듯 하다. 아베가 메이지 유신의 주체 세력들을 배출한 야마구치현(옛 조슈번) 출신으로 일본 군국주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천황제를 떠받드는 귀족 출신, 서양 귀족 엘리트를 누른 승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제국주의 국가를 위해 집단자결로 산화한 군대의 영웅. 일본 국민들에게 제국주의의 복고화를 주창하는데 니시 남작은 딱 맞아 떨어지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

도쿄올림픽을 기회로 일본 제국주의 시절을 방불케하는 ‘부국강병’ 국가를 꿈꾸고 있는 아베의 야심에 부합하듯 일본 도쿄올림픽조직위도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사용을 자제했던 욱일기를 허용하는 모습이다. 도쿄올림픽조직위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육군기와 해군기로 사용했던 ‘욱일기’를 도쿄올림픽 기간 전후 경기장 내에서 사용하게 하고, 욱일기를 활용한 유니폼·소품 반입도 허용하게 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우경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아베는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경제회생과 미·일 동맹 강화로 국민들의 신임을 두텁게 하는 한편 한국과의 관계서는 핵심 수출품목 규제라는 극약처방을 내놓고 초강수로 맞서며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있다. 아베에게 도쿄올림픽은 과거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가해국이라는 사실을 덮고, 전쟁과 핵무기의 희생자이자 핵무기 반대운동에 앞장서는 평화 국가로 이미지 변신을 꾀할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된다. 도쿄올림픽을 활용해 과거의 역사를 미화시키며 강력한 국가 이미지를 세우려는 아베에게 올림픽이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는 말은 무색하게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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