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금강 상류 미호천 평야를 지키다

신라로부터 뺏은 백제 ‘전부前部’ 세력 증명

청주 부모산성에서 바라본 청주 시가지 모습
청주 부모산성에서 바라본 청주 시가지 모습

청주시 강서동에 미호천(美湖川) 평야를 지키고 있는 우뚝 솟은 산이 있다. 바로 부모산이다. 고려 고종(高宗) 몽고군 침입 때 산성으로 피신한 백성들이 위급한 순간이 되었다. 그런데 성 안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나 목이 말랐던 고려인들이 목숨을 구했다. ‘부모 같은 은혜를 입었다’고 하여 부모산이라고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부모산은 100만 청주시민의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해발 230m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공원으로 단장시켜 놓았다. 그런데 이 산 위에 구축되어 있는 산성 유적에서 백제사의 비밀이 쏟아졌다.

부모산성은 청주로 통하는 길을 막고 넓은 미호천 평야를 보호하기 위해 구축했던 요새였다. 미호천은 괴산 음성에서 발원하여 청주를 거쳐 세종시를 지나 공주로 통하는 물줄기다. 백제왕도 웅진(熊津)의 인후(咽喉)와 같은 곳이다. 그렇다면 본래 이 땅의 주인공이었던 백제인들이 쌓아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 지난 2012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의 발굴결과 신라인들이 먼저 쌓은 유구를 찾은 것이다. 백제인들은 그 위에 성을 보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더욱 주목된 것은 바로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기와에 도장을 찍은 인각와(印刻瓦, 글씨를 찍은 도장처럼 생긴 기와)가 찾아진 것이었다. 부여 궁성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던 인각와. 왜 그것이 이 부모산성에서 나온 것일까. 인각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인가.

인각와는 바로 ‘전(前)’ ‘후(後)’ 등이었다. 전, 후는 바로 백제 왕도의 부여에 살았던 전부(前部), 후부(後部) 세력으로 이들의 일부가 파견되어 부모산을 지켰다는 것을 알려준다. 부모산은 백제, 신라의 처절한 전쟁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를 보면 신라 모산성은 백제인들의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초기 한성시대부터 웅진사비시기까지 공격한 기사가 나타난다. 서로 뺏고 뺏는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모산성은 어디일까.

신라 모산성은 <삼국사기>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전북 남원 운봉의 아막성(阿莫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모산성과 아막성은 따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또 진천읍에 있는 대모산성(大母山城)을 모산성으로 비정하여 왔다. 오늘은 백제 흥성과 처절한 전쟁 유산이 담겨져 있는 타임캡슐, 청주 부모산성과 주변 백제 유적 답사를 떠나 본다.

청주 고지도
청주 고지도

마한의 땅 애양국

경기, 충청, 전라지역은 본래 마한의 땅이었다. 그런데 마한 54개국 가운데 ‘애양국(愛襄國)’이란 나라가 있었다. 일부 기록에는 ‘원양국(爰襄國)’으로도 나온다. ‘애(愛)’와 ‘원(爰)’의 글씨가 비슷하여 생긴 착오이다. 54개국은 다음과 같다.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건마국(乾馬國)·고랍국(古臘國)·고리국(古離國)·고비리국(古卑離國)·고원국(古爰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포국(古蒲國)·구로국(狗盧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구소국(狗素國)·구해국(狗奚國)·내비리국(內卑離國)·노람국(怒藍國)·대석삭국(大石索國)·막로국(莫盧國)·만로국(萬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모수국(牟水國)·목지국(目支國)·백제국(伯濟國)·벽비리국(辟卑離國)·불미국(不彌國)·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불운국(不雲國)·비리국(卑離國)·비미국(卑彌國)·사로국(駟盧國)·상외국(桑外國)·소석삭국(小石索國)·소위건국(素謂乾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신분활국(臣濆活國)·신소도국(臣蘇塗國)·신운신국(臣雲新國)·신흔국(臣國)·아림국(兒林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염로국(冉路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원양국(爰(愛)襄國)·원지국(爰池國)·일난국(一難國)·일리국(一離國)·일화국(日華國)·임소반국(臨素半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지반국(支半國)·지침국(支侵國)·첩로국(捷盧國)·초리국(楚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치리국국(致利鞠國)

중국기록인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마한의 큰 나라는 1만 호가 넘으며 소국은 수천 호에 불과했다’고 기록된다. 또 마한에는 본래 성곽(石城을 가리키는 듯)이 없었다고 되었으나 위지(魏志) 동이전에는 젊은이들이 성곽의 축조에 간여했다는 내용이 있다. 마한의 성곽은 흙을 다져 쌓은 초기 토성일 것으로 상정된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 되는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고 기록돼 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젊은이들이 씩씩하고 용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맹한데 젊은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등가죽을 뚫어 줄을 꿰고 큰 나무를 매달고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강건함으로 여긴다.”

54개국을 통할했던 마한의 수장국은 목지국(目支國)이었다. 필자는 목지국의 옛 터를 지금의 안성-천안 직산으로 비정한 바 있다. 목지(目支)는 우리말로 ‘눈재’ 즉 안성(眼城, 安城)과 발음이 같으며, 안성의 옛 지명인 백성군(白城郡)은 백제(百濟)와 같은 표기다. 백제 온조가 마한의 동북방을 얻어 살다가 세력을 키워 목지국을 쉽게 정복한 것은 바로 안성이 위례성(漢城)과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청주 부모산의 본래 이름은 우리말로 ‘아양산’이었다. ‘아양’은 부모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아양산은 한자를 빌려 쓰면서 즉 ‘부왈야 모왈낭(父曰爺 母曰娘)’에 따라 ‘부모산’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낭산’이 ‘아양산’으로 불리다가 ‘부모산’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면 부모산에는 마한 유적이 남아있을까. 부모산록 동편에 지금은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청주화물터미널 일대의 낮은 구릉지역을 속칭 ‘아양동’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지역을 주목하여 답사를 해 왔다. 이곳에서 많은 무문토기와 와질토기 등 마한시기 유물을 수습하기도 했다. 토기의 분포는 더 넓은 지역까지 이뤄진다. 아양동에서 부모산으로 통하는 지역에는 인위적으로 구축해 놓은 토루(土壘) 흔적이 있으며 이곳에서도 여러 점의 고식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보다 주목되는 것은 부모산 아래 동네인 비하동에서 1972년 흑색마연토기 및 점토대토기가 함께 발견된 사실이다. 이 유물들은 이 지역의 마한 실체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조사된 유구는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 9기, 청동기시대 구상유구 1기·옹관묘 2기, 삼국시대 구덩이 5기, 8세기의 통일신라시대 석실분 2기, 석곽묘 3기, 가마 2기, 고려시대 이후의 토광묘 15기 등 다양하다.

부모산 아래 마한 ‘애양국’은 백제에 정복되어 신라가 점유하기 전까지 줄곧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상주한 백제 지배층은 부모산보다는 방어와 취락의 요지인 청주시 동쪽의 우암산(牛巖山)과 상당산성(上黨山城)을 더 주목하게 된 것 같다.

우암산에는 백제시기 내외성을 갖춘 판축 토성(당이산으로 불리움)이 구축되어 있으며 상당산성에도 삼국기에 쌓은 석성의 유지가 존재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청주를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라고 한 기록을 보면 우암산과 인근 상당산성이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 신봉동 고분군 출토 상황
청주 신봉동 고분군 출토 상황

백제 전사들의 집단 무덤 ‘신봉동 고분군’

지난 1970년대 후반 흥덕구 신봉동에서 깜짝 놀랄 대규모 백제 유적이 찾아졌다. 석실묘 3기, 토광묘 320기, 소형수혈유구 49기, 기타 유구 20기 등이 발견된 것이다. 백제 유적지에서 이처럼 많은 양의 유적이 발견된 예는 없었다. 유물은 놀랍게도 철제 마구류와 무기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각종 토기류와 옥석류 등 3000점 이상이 출토됐다. 필자도 지난 1970년대 초부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원근(강릉대 교수) 박사와 이 일대를 주목, 여러 차례 조사한 적이 있으며 주변에서 도굴로 인한 원삼국시대 토기의 파편 등을 확인한 바 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금제 유물이 발견되어 도굴꾼들로부터 이를 사들였던 한 의료인이 형사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신봉동 고분지역에서 찾은 토기들은 마한시기에 사용했던 붉은색의 와질토기부터 백제시대의 회색 경질의 토기 파편이었다. 그 후 산성연구의 권위자인 차용걸(전 충북대학교 교수) 박사의 노력으로 대대적인 발굴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게 된 것이다.

발굴자료에 따르면 신봉동 유적은 산자락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소형토광묘-목관묘-목곽묘-석실분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상부로 올라갈수록 무덤의 규모가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토광묘는 해발 96.7m와 97.5m 선상에 15m정도의 떨어져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게 조성됐다. 규모는 13-1호는 356×137×17㎝, 13-2호는 350×210×160㎝이며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다.

유물은 연질의 원저단경호, 회청색을 띠는 경질의 광구호편과 소호 등의 토기류, 환두대도, 표비, 교구, 철부 및 철촉 등의 철기류와 더불어 구슬이 다량 출토됐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은상감(銀象嵌)의 환두대도였다. 백제 지배층이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이 환두대도는 신라와의 전쟁 시 죽은 장수의 것으로 상정된다. 백제군은 높은 지대에 돌곽을 만들고 죽은 장수를 잘 매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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