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상봉 디자이너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이 디자이너 숍에서 본지와 갖은 인터뷰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들으며 미소를 띄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8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상봉 디자이너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이 디자이너 숍에서 본지와 갖은 인터뷰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들으며 미소를 띄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8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세월호 패션쇼 가장 기억에 남아”

한글 디자인, ‘이상봉’ 이름 널리 알려

“열정페이 논란, 더 단단해지는 계기돼”

후배들에겐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라”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디자이너도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한글 패션 디자인의 거장으로 불리는 디자이너 이상봉.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 소재는 세월호, 안중근, 평창올림픽 등이었다. 

‘열정페이’ 논란 등 부침을 겪기도 했던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은 미래를 보는 예측능력이다. 나아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도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런 그의 철학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이상봉 패션쇼’는 여러 방면에서 늘 앞서 나간다.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패션쇼, 평창올림픽을 소재로 선보였던 작품들, 세월호 희생의 아픔을 다룬 뉴욕에서의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그는 매번 새로운 작품을 런웨이에 펼쳐 보여 놀라움을 안길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는 평가다.

이들 대부분은 그의 의지대로 실현되고 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패션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온 국민이 눈물짓고 아파했던 세월호 패션쇼를 꼽았다.

“세월호 사건으로 저 또한 너무 아팠고 힘들었는데, 이를 승화했던 9월의 컬렉션이 기억에 남는다”며 “평소 컬렉션에 사회적인 메시지들을 담으려고 하는데, 당시 ‘하늘가는 길’을 테마로 했던 컬렉션은 많은 관객들에게 위로를 줬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그의 작품 세월호, 안중근, 평창올림픽 등은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 지향점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한글 패션, 운명이 되다

“한글 옷을 무대에 올리겠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다. 촌스럽다는 것이다. 또 한글을 옷에 사용한다는 게 괘씸해서인지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명이 됐다.”

현재는 운명이 된 한글 디자인을 적용한 이 의상 덕분에 ‘이상봉’이라는 그의 이름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글 외에 창살, 조각보, 단청, 산수화, 소나무, 자수, 자개 등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영감 얻은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거듭났다.

그는 200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전에서 선보인 ‘한글 패션’을 언급하고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알린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면서도 “처음 시도였기 때문에 일반 옷을 만드는 것보다도 몇 배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일단 관련 자료들이 하나도 없었다”며 “한글이라는 문화적인 요소를 옷에 덧입히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을 찾아내고 연구하는 작업이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한글 디자인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에 대해선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 꿈은 조금 버리자고 마음을 먹었다”면서 “패션계에서 기대하는 바도 있는 만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 양보하고서라도 우리 문화 요소를 세계에 알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상봉 디자이너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이 디자이너 숍에서 본지와 갖은 인터뷰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8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상봉 디자이너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이 디자이너 숍에서 본지와 갖은 인터뷰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8

◆‘열정페이’ 논란… “부끄럽지 않아”

“정말 부끄러웠다면 스스로 패션계를 은퇴했을 것이다. 젊은 후배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됐다. 지금도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한동안 언론 맨 상단에 오르내렸던 이른바 ‘열정페이’ 논란이다. 그는 지난 2014년 자신의 디자인실에서 견습이나 인턴에게 근로기준법상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제공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유독 뼈아팠던 ‘열정페이’ 논란에 대해서 물으니, 그는 이같이 답변하고 “정말로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때라 더더욱 그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유명인이라는 것 때문에 억울한 면도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지만 결국은 변명으로 비쳐질 수 있다”면서 “내가 그들에게 기회만 줬지 대화하지 못했고, 대표로써 관리를 못한 부분도 있어 그냥 다 안고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다만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기자라면 사실 확인을 해야 하는데 저한테 어떤 확인도 하지 않고 보도한 건 비겁한 일”이라며 “아무리 논란이 되는 사회적 이슈라도 언론인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놓친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났다.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다지는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고교패션 콘테스트, 꿈꾸는 후배들 도전의 장”

그는 젊은이들을 만나고 후배 디자이너를 위한 활동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1년 중 1/3을 해외에서 보낸다는 데도 말이다.

“가장 바라는 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는 뉴욕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데, 뉴욕에서 살아남아 후배들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고교패션 콘테스트다. 이 콘테스트를 통해 성장한 아이들이 우리나라 패션계 발전을 이끌어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교 콘테스트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갖가지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그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은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닌 디자이너를 꿈꾸는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고교 콘테스트는 고등학생들의 패션 디자이너 꿈을 이룰 수 있는 도전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는 선배 디자이너로서 후배 디자이너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디자이너로서의 생명력을 갖으려면 자기만의 색깔을 가져야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인정해야 한다. 젊은 시절 갈등이 많았다. 해외에 나가보면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내가 초라해 보였다. 그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인정하면서부터다. 내가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노력하자는 개념이었다. 나를 알고 나를 믿어야 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 그래야 도전도 할 수 있다.”

그는 무려 35년을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고 한다. 35년 전 처음 만들었던 명함을 꺼내 보이면서 “지금까지 디자인과 재질을 바꾸지 않았다. 또 하나는 내가 37살 때 내 자신을 버리면서 내가 패션 디자이너를 할 때까지는 37의 나이를 가슴에 두고 살겠다고 다짐했다”면서 “이 두 가지가 내가 지키는 초심이자 힘인 것 같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상봉 디자이너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이 디자이너 숍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8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이상봉 디자이너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이 디자이너 숍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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