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헛되이 목소리 기세만 높인다’는 의미의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우리사회에 만연하는 곳이 있으니 정치판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말만 앞서고 행동은 따라가지 못하니 소리만 요란하고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올해는 선거를 1년 앞둔 해라, 그간 의정에 충실하지 못한 정치권이 정신을 차리고 국민을 위한 정치로 내년 총선에서 표심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치권이 국민을 위한 마음이 없고 자신과 소속 정당의 이익에 매몰돼 소리만 시끄러운 한해였다.

구태여 올해 벌어진 정치적 민폐 사건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국회의 문이 열려도 식물국회에서 동물국회로 전전하다가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보이는 꼴은 그보다도 못한 의식불명 상태의 추태이다. 여야가 의정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민생을 보살피는 일에만 밤낮없이 매달려도 다 해결하지 못할 국내외적 난제들이 산적돼 있건만 허구한 날 티격태격하다가 정기국회 폐회를 며칠 남겨두고 심정지 상태로 멈춰 서 있다.

어린이 안전법안, 유치원 3법 등을 비롯해 서민이 목 빠지게 기다렸던 민생법안들이 자유한국당이 정국 주도권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살기(必殺技) 정략에 막혀버린 것이다. 즉 한국당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있는 199건의 법안에 대해 의사방해(필리버스터) 신청을 한 것인데, 필리버스터가 아무리 ‘의회 안에서의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라 해도 제1야당의 선택 폭이 그것밖에 없었을까 한국당 지도부의 정국을 푸는 혜안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기국회 마감을 앞두고 시급한 민생법안 190여개 법안은 여야 간 무쟁점 법안이라 통과를 약속했던 것인데, 느닷없는 ‘너 죽고 나죽자’식 자폭 당론에 정부여당뿐 아니라 소수야당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보다 더 분노하고 상처받은 편은 국민이다. 소위 ‘민식이법’으로 통하는 ‘도로교통법 일부개정안’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마저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신청으로 멈춰 섰는데,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발생된 교통사고로 인해 자식을 잃은 어버이와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국회가, 원내정당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자기 이익과 철저히 계산된 당리당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도대체 분간하기 어려운 지금이다.

연말이 가까워오면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마련이지만 올해는 유달리 어수선하다. 정치권에서 일어난 국민 무시행위들이 연거푸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해 일어난 큼지막한 사건들, 국회에서 정상적인 회의마저 물리력을 앞세워 봉쇄한 한국당의 불법에서 기인돼 110명의 여야 의원들이 국회선진화법 등 위반 혐의로 무더기 고소․고발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데다가, 또 도덕적 흠집이 많은 인사를 장관직에 임명해 그로 인해 야기됐던 사회의 불공정과 국민갈등을 낳게 했던 ‘조국사태’는 또 어떻고, 이런 사건들의 자초지종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정치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국회가 민의의 전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이며,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최고권력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닌지 그 판단조차 뒤죽박죽돼 혼란투성이다.

과거 정부나 정치사에서 가끔씩 발생했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지금은 상례적으로 들이닥치고 있으니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정체 내지 후퇴가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제도의 룰에 따라 모든 일들이 진척되고 있다지만 국회, 정치권이 보란 듯 불법을 일삼고 일부 사회지도자층의 일탈로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으며, 이념 대립, 빈부 격차의 심화 등으로 사회갈등이 조장되고 있는 상태여서 미래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져버렸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낙후된 민주주의가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짓누르고 있는, 한 마디로 꿈이 없는 사회가 됐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부국안민(富國安民)에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힘을 모아 국민의 삶 향상을 통해 편안을 보장하는 게 지극히 마땅한 일이지만 오히려 국민이 정부와 정치권을 걱정하는 기현상이 돼버렸으니 이런 국가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을 과연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민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서사(敍事) 즉, 이야기(내러티브)가 없다. 어떤 서사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이나 예측 가능한 단초들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일관성이 없고 부정적인 내러티브만이 흉흉히 존재하는 미친 사회가 돼버린 것이다.

지금 정치권은 제1야당이 내놓은 어쩌면 20대 국회를 완전히 매몰시킬 수 있는 메가톤급 지뢰밭 ‘필리버스터’ 전운(戰雲)에 휘감겨 있다. 이러한 현실이니 국회 존재성의 바탕인 ‘부국안민’은 강 건너 불이 돼버렸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우리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가져야 할 공통 관심사, 내러티브의 공유인데, 그것을 먼저 헤아려야하는 정치권이 국민 갈등을 조장하고 내부 긴장을 조성했으니 이래도 국회가 ‘국민을 위하는’ 국가기관이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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