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은영 기자] 이병진 동명대학교 교수가 본지 사무실에서 이명박 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8년간 옥고를 치렀던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2.3
[천지일보=강은영 기자] 이병진 동명대학교 교수가 본지 사무실에서 이명박 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8년간 옥고를 치렀던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2.3

국제 정치학자이자 인도 전문가
‘끝나지 않은 야만, 국보법’ 저자
대학시절 두 차례 방북길에 올라
“반공교육과는 다른 북한 모습에
점차 적대감에서 동포애로 변해가”
北에 대한 관심에 국정원은 ‘의심’
‘국보법 위반혐의’ 0.7평 독방살이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여기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바로 정치학자이자 인도 전문가 이병진(49) 교수다. 이 교수는 한반도 정세가 전쟁 위기로 치닫던 시기인 1993년과 1994년 두 차례 방북 길에 올라, 이명박 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8년간 옥고를 치렀던 인물이다. 본지는 이 교수의 인도 유학 과정과 그곳에서 만난 북한 유학생 이야기, 두 차례 방북 과정, 체포와 수사, 수감과정 등 그의 인생에 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눠봤다.

“대학가서 교육제도 한계 느껴”

이병진 교수는 한국외국어대와 동명대에서 인도철학과 남아시아 국제정치학을 가르치면서도

국내에서 유일한 인도박물관 사무국장도 역임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직종의 연관성에 대해 묻자 그는 ‘허허’ 웃으며 자신의 직업에 대해 운을 뗐다.

고등학교 때 유독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았을뿐더러 자료도 없고, 선생님들도 잘 모르는 나라였기 때문에 이 교수는 그 나라에 대한 궁금증만 더욱 커져갔다.

어린 시절 남달리 왕성했던 호기심에 그는 무턱대고 인도라는 나라에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영사관을 찾았다. 영사관에서 깨달은 것은 바로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영사관의 도움으로 영어를 공부했고, 그토록 가고 싶었던 인도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수학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갔으며, 자신이 고등학교 때 느꼈던 대학입시제도와 교육제도의 한계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고등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등을 시키면서 주입식 교육으로 대학만 가면 인생이 보장된다는 듯이 교육해서 대학만을 위해 달려왔는데, 공부는 무슨….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기는커녕 학생들은 데모만 하고 있고, 그때 대학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죠.”

그는 교육정책에 대해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학에 대해서도 공부하면서 더 많은 문제의식을 느끼게 됐고,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의식도 갖게 됐다고 했다. 또 당시 민주화 운동 분위기도 겹치면서 사회 이슈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 교수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치가 중요하구나”라고 고등학생 머리로 막연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오직 수학에 관심 있어 하던 이병진은 1991~1995년 동안 유학 중 ‘정치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

‘호기심’에 두 차례 방북길 올라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시아인들이 주로 가는 재래식당에서 인도로 유학 온 북한 학생들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경찰관 아버지를 둔 그는 박정희 대통령 선거 당시 그 누구보다 반공의식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북한 사람이 무섭고 거리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배웠던 북한의 모습과 자신이 본 북한 학생들의 모습이 달랐기에 거리감은 점차 좁혀져 갔다.

“그곳에서 만난 북한 학생들은 그동안 배웠던 북한과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요. 들었던 것과 달리 그들의 머리에는 뿔도 안 달려있었고, 저와 같은 음식을 먹었죠. 또 저와 같은 한국어를 하더라고요. 인도라는 낯선 나라에서 만난 그 친구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자연스럽게 적대감에서 동포애가 생겨났죠.”

인도라는 나라가 궁금해서 인도에 갔듯 그는 북한 유학생들을 통해 알게 된 북한의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결정적인 것은 국제 책 전시회에 갔을 때 북한의 수도 평양 사진을 보고 더 큰 궁금증이 들었다. 직접 가면 더 좋다고 하길래 따라갔더니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외교관을 통해 당시 학생이었던 이 교수를 보내준 것이었다고 했다.

두 번째 방북은 미국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던 즈음이었다. 한반도 정세가 안 좋았던 북핵 문제의 뿌리의 시작인 시기였다. 북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관광 차원으로 갔던 첫 방북 때와는 달리 이번 방북에서는 남한과 북한 간의 입장차를 느꼈다고 했다.

“첫 방북 때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돌아왔는데, 반공교육과는 다른 북한의 모습에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생기고 질문만 더욱 늘어나지 뭡니까. 북이 어떤 상황인지 궁금증은 커지고 곧 있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니, 북에 간다고 해서 죽으나 남한에 있다가 죽으나 같다고 생각했고, ‘빨리 갔다가 오면 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웃음). 그래서 한 달간 북한 대사관 도움으로 갔다 오게 된 거죠.”

이 교수의 호기심은 결국 국정원의 의심을 받게 됐다. 국정원은 그가 북한에 가서 간첩 교육을 받고 남한으로 들어와 활동했다고 봤다. 이때부터 이 교수의 영화 같은 인생이 시작됐다. 이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정원은 내부적으로 인지수사를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방북을 두 차례나 했던 나도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이 교수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했다고 봤다.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하도록 제정한 법률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법률상 북은 이적 국가입니다. 범죄 집단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제가 그런 단체(북한)에 들어가서 편의를 제공받고 주는 음식을 먹고 대화도 나누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했기 때문에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질서나 안전을 위협하고 흔드는 존재로,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국보법 위반 혐의’ 감옥서 8년 보내

방북을 해서 북한 인사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이 교수는 2009년 9월 국가정보원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그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냐는 질문에 그는 정신이 없었다고 답했다. 그는 “당시 법률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변호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으며, 또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입안이 벙벙했다”고 했다.

그는 “진술을 하더라도 사실관계를 따지며 해야 했는데, 너무 억울하고 놀라다 보니 간첩이 아니라고만 했다”며 “국정원에서 발목을 잡은 것은 특정 시점에 왜 해외에서 북한 공장을 만났냐는 거였다. 나는 정세 토론하면서 만난 것이었다며, 더 자세히 설명하다가 그만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게 됐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에 갔다 왔다는 그 죄 자체가 공소시효가 끝났던 사건이었던 것을 알게 됐다”고 이 교수는 주장했다.

만기 출소하던 2017년 9월까지 8년 동안 수사와 재판, 수감 생활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곧바로 ‘알몸검신’을 떠올렸다. 유창하게 말하던 그의 말 수는 점차 줄어들고 활기찼던 분위기도 곧장 무거워졌다.

“그때가 가족들을 만나고 난 뒤였는데 곧바로 알몸검신을 받아서 동물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은 심리적 박탈감에 괴로웠습니다. 이후 0.7평 되는 독방에 갇혀야 한다는 그 우울한 감정에서 했기 때문에 좌절감이 심했죠…”

그런데도 이 교수는 수감 중에도 계속해서 칼럼과 논문을 기고하며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출소 후에는 ‘끝나지 않은 야만, 국가보안법’을 출간했다.

“인도 정치전문가로 역량 키울 것”

앞으로 삶의 계획에 대해 이 교수는 “현재 인도와 중국에 대한 정치적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다. 남북 해결 고리에 시사점을 줄 것으로 보인다”며 “인도 정치 전문가로서 역량을 키우는데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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