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20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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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건축가
그는 항상 바보스럽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꿈을 데워줄 공간인데 말이다. 항상 방황하고 혼돈을 느낀다. 색감만 달라도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자기를 맞춰줄 공간을 찾는다. 

뭐랄까? 현재는 미래의 어떤 지점을 보기보다는 지금의 체감온도를 존중한다. 그래서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서 공간의 느낌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공간을 찾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은 없었다. 있는 공간에서 찾는다. 공간이란 현실을 담아낸 미래가 된다. 그래서 한상 분주하고 마음이 바쁘다.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적응하며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실패도 용서 될지 말지 고민도 없다. 항상 망치지 않은 자신의 적응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망치지 않으리라 믿는 것이다. 희망이 오히려 싹트는 것인가 싶다. 만들어진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하고 생활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어쩌면 그런 일상의 흐름이 공간에서 그의 생각의 틀을 일부 만든다. 존엄성은 공간에서 배양되는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어떤 타고난 자율성보다는 적응에서 생기는 존재감이 존엄성의 근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는 그래서 항상 분주하다. 내일을 걱정하고 서두른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함을 생활화한다. 

현실은 꿈이 데워질 공간에 있고 공간이란 현실을 담은 미래다. 그래서 가상의 세계는 현실의 연장선에 있고 새롭지만 새롭지도 않다. 현실은 미래의 씨앗이기 때문에 이미 익숙하다. 

익숙한 공간이지만 체감온도는 서로 다르다. 그래서 미래를 예측 못하는 건 아닌지? 공간은 그 순간을 담고 미래를 기다린다. 가득 채우면 부담을 느끼고 부족하면 허전한 느낌이다. 채우는 순간부터 괜히 간섭이 일어나고 자신의 마음을 흔든다. 공간은 어떤 경우에도 망치지 않고 마음의 온도를 좌지우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하면 안 될 것 같이 굳어 버린다. 

생각의 영역이 공간이 된다면 공간에서 존엄성을 부여받고 즐길 수 있다. 비어 있어 공간이라 불리지만 존재감이 없고 비어있는 것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순간 존재감이 생기고,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며 존엄성이 깃든다. 그는 존엄성 있는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공간을 가득 채우면 쓸모없는 것이 된다. 망치지 않기 위해 비우고 쓰기 위해 채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정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둔다. 본질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쓸모 있는 일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도 과거가 미래를 대변할 수 있다. 이것이 망치질 않기 위해 본연 그대로의 성질을 보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비워두지 않고 채우지도 않는 것. 그 성질이 가지는 온도와 그 모호한 성질의 온도로 채워진 공간이 있다. 채워서 넘치지 않고 비워서 모자라지 않은 적절한 온도의 공간의 편안함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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