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대마도 이즈하라 수선사(修善寺)에서 면암 최익현(1833~1906) 순국비를 보았다. 비 앞면에는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 비는 1986년 8월 3일에 한국 일해재단(日海財團)과 대마도 대표들이 세웠다.

순국비 제막식 때 KBS 취재팀이 대마도의 향토사학자 나카도메 히사에와에게 “항일투사의 순국비를 왜 일본에 세우는가?”라고 질문했다. 나카도메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같다. 이를 주창하는 것이 곧 무사도(武士道)이다”라고 답했다. 일본에 무사도가 있다면 조선에는 선비정신이 있다.

그러면 최익현의 순국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장지연이 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은 백성들은 통곡했다. 홍만식·민영환·조병세가 자결하고 최익현 등 선비들은 잇달아 ‘을사늑약은 무효이고 이완용·박제순 등 오적을 처벌하라’고 상소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이러자 최익현은 의병투쟁을 계획했다. 그는 전라도를 주목했다. 경기도 포천출신이지만 최익현은 전라도에도 문인이 여럿 있었다. 그는 문인 고석진의 주선으로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병찬을 만났고, 1906년 5월 29일에 담양군 추월산 용추사에서 기우만 등 호남 유생 50명과 만나 대일항전을 협의했다. 6월 4일에는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거의(擧義)를 호소했다. 이때 80명의 유생들이 자원했다.

최익현은 일본의 기만적 배신행위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면서 의병모집에 전력을 다해 900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포수들도 참여했는데, 포수 채상순은 초대 대법원장을 한 김병로와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

이러자 조선 정부와 일제는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6월 12일에 순창전투가 일어났다. 교전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을 알게 된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 해산을 명했다.

6월 14일에 조선군 진위대는 최익현과 ‘12의사(義士)’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8월 14일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은 대마도 감금 2년을 선고했다. 부산포 초량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바닥에 흙을 깔았고 임병찬에게 물 한 동이를 떠오게 했다. 일본의 흙을 밟지 않고 일본 물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8월 27일에 대마도 이즈하라 일본군 위수영에 투옥된 최익현은 단식 투쟁해 1907년 양력 1월 1일에 순국했다. 74세였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1월 1일에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었다. 왜놈들도 그의 충의에 감복해 줄지어 조문했다. 1월 5일에 시신이 부산에 이르자 장사꾼들이 시전(市廛)을 거두고 통곡했다. 승려·기생·거지에 이르기까지 부의를 들고와 인산인해를 이루니 저자 바닥 같았다. 동래에서 떠나던 날에는 상여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다. 상주에 이르자 왜놈들은 상여를 기차에 싣고 고향에 도착했다.”

청나라 원세개와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추모 글을 보내왔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애도의 뜻 하나 표하지 않았으니 친일파가 득실거린 탓이었다. 1월 20일에 최익현은 충남 예산군 무동산 기슭에 묻혔다. 면암 최익현! 그는 정녕 애국지사(愛國志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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