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풍납토성
풍납토성

도미가 있던 천성도 위치 비정

서울 강동구청은 암사동에 있는 ‘두무개’라는 지명을 도미와 연계시키고 있다. 2004년 3월 20일, 천호 1동의 천일공원에 도미부인의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동상의 무게 문제로 2009년 10월에는 녹지공원으로 이전하였다.

충남 보령시는 전해 내려오는 지명을 근거로 도미 부부 설화의 무대는 보령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보령시 오천면에는 도미부부 설화와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있다. 미인도(美人島), 도미항, 상사봉(想思峰), 원산도(怨山島) 등을 도미의 설화와 연관시킨다.

시는 1992년 소성리(蘇城里)의 상사봉 정상에 도미부인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정절각(貞節閣)을 만들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도미부인의 사당인 정절사를 지어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다. 도미부인 사당이 위치한 오천항은 백제 때 회이포(回伊浦)로 불린 곳이다. 대륙 중국과 왜국과 통했던 교역항이었다. 임진전쟁 때는 명나라 수군이 상륙한 곳으로 알려졌다.

성주 도씨(星州 都氏)는 도미를 도시조(都始祖)로서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에는 ‘백제정승 도미지묘’라는 묘소가 있었다. 이 묘소는 2003년에 임해공단 개발부지 내에 편입되어 지금은 보령시로 이장되었다. 조선 후기 도명응(都命應) 등이 편찬한 <성주도씨족보>에는 ‘후손 도미는 한 환제 연희 때에 백제 개루왕을 섬겼다(後孫都彌, 漢桓帝延喜時, 佐百濟蓋婁王)’고 하여 도미를 개루왕을 보좌한 인물이라고 표현하였다.

보령시의 주장에 반발하는 지자체도 나왔다. 경기도 하남시는 2009년 10월 31일에 하남문화원 주최 ‘제1회 도미설화 학술대회’를 열고 보령시의 도미부인 설화를 위작으로 단정하면서 하남 지역이 근거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강화군 마니산 하늘재설

도미부인이 눈먼 남편을 만났다는 천성도(泉城島)는 한강 하류임에는 부인할 여지가 없다.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천성은 천성(天城)으로 표기될 수도 있으며 이는 우리말로 해석하면 하늘재이다. 한강 하류에서 하늘재로 표기된 산은 바로 강화도에 있다. 강화군 여차리 마니산 청소년수련원 뒷산에 하늘재가 그 곳이다.

강화도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에 일시 복속되었으며 중요한 요충지였다. 고구려에 복속된 시기는 아마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시 이후로 보인다. 이 시기 한강 상하류 일대가 많이 점령된 것으로 상정되며 그 아들 장수왕대는 본격적인 고구려 통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제일의 지리서인 <여지승람>에는 백제 경영사실이 빠지고 고구려 령으로만 나온다.

<동국여지승람> 제 12권 강화도부 건치 연혁조를 보면 강화는 본래 ‘고구려 혈구군인데 갑비고차라고도 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 해구로 고쳤다(本高句麗 穴口郡 一云 甲比古次 新羅 景德王改 海口 云云)’고 돼 있다. 하늘재가 존재하는 강화 마니산은 단군설화가 어린 민족의 성산이다. 참성대는 고대로 단군에게 제사를 지낸 곳으로 사적 제136호이며 단군이 쌓았다고 세전되어 온다. 참성단의 축조는 단군을 숭배했던 고구려나 백제의 소축으로 상정할 수 있다.

마니산은 해발 490m 고산으로 고대 신단(神壇)을 만든 적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은 해발 658m로 정상에 백제 때 축조된 제단이 있다. 고구려 백제 모두 단군과 주몽을 숭배한 민족으로서 이 시기 하늘에 제사하기 위한 설단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늘재가 있는 마을은 ‘여차리’로 고구려식의 지명이다. 차(次)는 치(此)로도 쓰이며 혈구(穴口)의 구(口)로 변화된 것이다. 고구려 요은홀차(要隱忽次)가 신라 때 양구(陽口)로 변화된 것과 비교된다. 과연 도미가 한강을 내려와 이곳에서 부인을 만난 것일까.
 

교하가 표시된 옛 지도
교하가 표시된 옛 지도

백제 천정구에 대한 고찰

파주시의 옛 지명인 교하(交河)는 한강 하류와 임진강 하류가 합류하는 지역이다. 세종 때 가인 난계 박연(朴堧)은 이곳을 지나면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푸른 바다 물결은 고을 문에 닿았고

화사한 봉우리의 푸르름은 붉은 구름에 비치네

온 마을이 뽕 밭이라 다른 일이 없어

우리 님께 푸른 비단 드리고자 하네

-여지승람 교하현 조 滄海餘波接縣門

어문학자들은 ‘교하’를 백제 시대 ‘얼매곶(於乙買串)’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한다. 암수의 교미(交尾)를 고유어로 ‘어르다’라고 하며 백제어로 물을 ‘매’라 하였고 교미를 ‘얼-’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장악한 뒤 이곳을 ‘천정구(泉井口)’라고 불렀다. 즉 ‘얼=泉’ ‘매=井’로 표기한 것으로 따지고 보면 같은 뜻이다. 이후 신라 경덕왕(757)이 교하(交河)로 개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35 잡지 제4 지리조 ‘交河郡 本 高句麗 泉井郡縣 景德王改名 今因之云云’

신라가 한창 대당 투쟁을 벌이는 시기 등장한 성이 바로 천성(泉城)이다. 신라와 당은 주로 임진강을 경계로 각축전을 벌였다. 675년 9월 당 장수 설인귀(薛仁貴)는 숙위학생 풍훈(風訓)을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하였다(薛仁貴 以宿衛 學生風訓之父 金眞珠伏誅於本國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 我將軍文訓 等 逆戰勝地云云). 신라의 장수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1400명을 목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패전한 설인귀는 포위를 풀고 달아났으며, 이 과정에서 말 1000필을 노획하였다.

천성전투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제일 큰 승리를 거둔 675년 매초성(買肖城, 연천군 소성리)전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매초성 전투는 어떤 전쟁이었을까.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9월조를 보면 ‘가을 9월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만 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二十九日 李謹行 率兵二十萬 屯 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 馬三萬 三百八十匹 其餘兵杖稱是 云云)’는 기록이 있다.

매초성 전투는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평양에서 요동으로 축출한 역사적인 전쟁이다. 교하 천성에서 당군이 패하면서 신라는 승기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오두산성(烏頭山城)으로 기록되는 고대성 유적이 있다. 이곳이 대당전쟁의 승전지인 천성(泉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것이다.

오두산성 성벽
오두산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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