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이하 생략).

이 시는 호가 수주(樹州)인 변영로(1898~1961) 시인의 ‘논개’라는 시 가운데 일부다. 이 시를 알기 전까지 논개(論介)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 적장과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한 한낱 기생으로 알았던바, 수주 변영로 시인의 시 ‘논개’를 접하고 나서 또 그 후에 내가 진주개천예술제 행사에 참가해 남강, 촉석루 등 현장을 두루 살피며 논개와 관련된 내용들을 목격한 뒤에야 가치 있고 의로운 죽음이었음을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논개’ 시에 대한 잔상이 남아 시의 첫대목에서 나오는 ‘거룩한 분노’는 무엇이며, 어째서 종교보다 깊을까 하고 내내 생각했던 시절도 내게는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20대 중반이고 문학을 향한 열정이 높던 때라 특정 개념에 대한 풀이를 시문학적 테마에 중심을 두다 보니 작품 속에 녹아있는 변영로 시인의 초인 같은 힘, 또는 논개의 애국정신을 시화(詩化)시켜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의 마음을 노래했던 것으로 막연히 알았다.

시문학적 자료를 살펴보니, 수주 선생은 그의 나이 스무 셋이던 1921년 ‘신천지’ 1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 논개를 그 이듬해 ‘신생활’에 발표했던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논개’는 현대시 탄생 이전에 신문학 초창기에 쓰인 신시(新詩)로 고도로 압축된 시 속에 서정과 주제의식이 빼어난바, 시인의 나이 20대 중반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의 생채기를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민족정신을 일깨웠으니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시가 담긴 시집 ‘조선의 마음’이 1924년 발간되자마자 판매 금지와 압수당하는 등 고초를 당했으나 애국을 향한 논개의 뜨거운 충정은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기운으로 녹아든 것이다.

앞에서 수주 변영로 시인의 ‘논개’ 시를 인용하고 길게 설명한 것은 ‘거룩한 분노’ 시 대목이 종교와 관련된 연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 무종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에서 종교가 국가사회에 어떤 역할로 반듯하게 자리 잡아야하며, 또 신앙심을 갖춘 종교인들의 우리사회를 정화시키고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얼마나 간여하며, 타종교를 존경하며 같은 종교 간에 반복질시하지 않고 공존하는, 종교와 신앙의 절대적 힘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 마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를 조절해 자기향상성이나 사회 기여를 높여가자는 의도에서라 하겠다.

어떤 사실과 현상에 대해 무턱대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해 공익을 위해 사용된다면 ‘거룩한 분노’가 될 수 있을 터, 우리사회의 바른 가치관과 도리가 무너질 때에 공분(公憤)으로 나타나 사회 불의와 부정을 없애는 근원으로 자리 잡게 하는 ‘거룩한 분노’는 현실의 흠집투성이가 되고 타락한 종교보다는 분명 깊다고 하리라. 이러한 필자의 지적은 종교와 종교인이 국가사회의 면면을 비추는 거울로서 소명을 다해야한다는 기대이다.

‘종교는 경이로움이 따라야 한다’는 필자의 평소 생각이 얼마 전 어떤 장면을 목격하고서 적이 놀랐다. 바로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예수교회)이 주최한 ‘지구촌의 전무후무한 빛, 신천지 12지파 10만 수료식’ 행사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지인이 당일 행사에 참석하고서 저녁 무렵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왔던바, 그 영상물 초입 부분을 보는 순간 아찔했다. 수료식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저리도 많은 성도들이 모여 집단 수료식을 하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의례 목적의 행사를 성료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경이롭게 생각했던 것이다.

지난 1985년부터 10년마다 종교인조사 통계를 발표하는 통계청의 최근 자료(2015 종교인구조사)에 따르면, 종교인구(43.9%)보다 무종교인(56.1%)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해마다 종교인이 크게 줄어가는 현실에서 신천지가 매년 10만여명 급성장해 내년 이맘 때 쯤이면 40만 성도가 돼 성인 인구 100명 중 1명을 차지한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성경의 말씀과 참 진리를 좇는 신천지예수교를 부정하며 저항하는 특정 기독 종단의 온갖 비난들이 무색해질 정도다.

무릇 종교는 사회의 빛이 돼야하고, 종교인은 그에 걸맞는 수범을 보여야 하거늘, 종교단체가 타 단체의 급신장을 시기하고 잠재적 성도 확장력에 놀라 사실과 다르게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필자가 판단하는 종교인의 자세는 타종교를 존중하면서, 그 목적인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우리사회의 불의에 공분을 느끼며 정의롭고 공정하도록 행동해야 한다. 즉 참다운 신앙심을 가지되, 민생을 짓이기는 몹쓸 권력에 대해선 공분하는 ‘거룩한 분노’를 보여야 함이다. 그것이 시대를 살아가는 참용기요, 우리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종교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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