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비 경기 있는 날, 도시는 축제 분위기

뉴질랜드 대표하는 국민스포츠로 발전

럭비 경기장 갖춘 도심 공원도 많아

세계 럭비의 왕으로 군림한 ‘올 블랙스’

‘머드 풋불’에서 시작된 럭비

럭비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국민스포츠로 일찍이 자리잡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럭비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국민스포츠로 일찍이 자리잡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유별난 럭비 사랑

뉴질랜드인들의 럭비(Rugby) 사랑은 유별나다. 문화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연결 고리가 럭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한산하고 조용하던 도로가 인파로 붐비고, 차분해 보이던 뉴질랜드 사람들이 열광하는 때가 있다. 이때가 ‘럭비’ 경기가 열리는 날인데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다.

대학입시 면접시험 또는 입사 면접시험에서조차 면접위원이 럭비를 좋아하느냐고 물을 정도다. 럭비는 일찌감치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국민스포츠로 발전했다. 그 시기가 1890년대였으니 13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남녀노소, 모든 계층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럭비는 ‘럭비 크레이지스(rugby crazies)’를 양산했다. 뉴질랜드 전역의 도심 곳곳에 조성된 공원에는 크고 작은 럭비 경기장이 마련돼 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럭비를 즐기는 것은 물론,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 럭비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주말마다 전국적으로 1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럭비공을 쫒는다 하니 그들의 럭비에 대한 애정과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은 럭비의 본거지인 영국 못지않을 정도다. 뉴질랜드인들은 공정한 경쟁을 기반으로 한 승부욕이 대단하다.

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은 ‘올 블랙스(All Blacks)’다. 1884년에 결성했으며 국제 경기의 시작은 1903년에 호주와의 경기를 통해서였다. 이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명실상부 20세기 세계 럭비의 왕으로 군림해 왔다. 팀 결성 후 130년이 지나는 동안 국제 럭비 경기에서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75%라는 승률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수치는 지금까지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이룬 가장 높은 승률로 알려져 있다. 1905년 뉴질랜드 대표팀은 영국 ‘하틀풀 클럽(Hartlepool club)’을 상대로 원정 경기를 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경기장에 입고 나온 뉴질랜드 선수들의 유니폼의 색깔을 보고 영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상의, 하의 유니폼은 물론 양말까지 온통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선수들은 검은색이 자신을 수호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all blacks’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국민스포츠 럭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국민스포츠 럭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운동

럭비의 시작은 1800년대 초 영국의 진흙 밭에서 시작된 ‘머드 풋볼(Mud football)’이 원류였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진흙 밭에서 ‘머드 풋볼(Mud football)’이라는 운동을 즐겼다. 이 운동은 편을 가른 다음 도로를 사이에 두고 진흙 밭에서 공을 든 채 상대방 지역까지 뛰어다니는 운동이었다.

럭비는 특유의 움직임과 의리를 동반한다. 빠른 동작, 선수들 간의 많은 태클과 서로 몸과 몸을 부딪쳐야 하는 거친 동작이 끊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거친 운동이 대중들이 즐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기우에 불과하다. 뉴질랜드는 어렸을 때부터 럭비 친화적 환경을 조성한다. 3-4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럭비교실이 있을 정도다. 따라서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럭비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다. 최근에 럭비가 거친 플레이라는 점에서 탈피하고자 두 가지 종류의 럭비를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하나는 터치 럭비로써, 태클 대신에 손으로 터치하는 동작이다. 다른 하나는 플래그 럭비로 허리춤에 작은 깃발을 달고 상대편의 깃발을 뺏으면 태클을 한 것과 같게 취급한다.

럭비 사랑이 남다르기에 국가 정책적으로 초등학교부터 대부분의 학교 교육과정에 럭비 과목이 개설돼 있다. 뿐만 아니라 방과 후 프로그램도 별도로 개설돼 있다. 대부분의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의 20% 정도가 럭비를 체육 선택 과목으로 택한다.

그들은 격렬한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즐긴다. 또 럭비를 즐기는 데 남녀 구분이 없다. 럭비클럽만 해도 전국적으로 약 590개가 만들어져 있으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등록된 회원수가 16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여자 회원은 15%로 약 2만 5천 명에 이른다. 뉴질랜드 인구가 500만 명이라는 점에 비춰 볼 때, 럭비 회원 수는 꽤 많은 편이다.

 

20세기 세계 럭비의 왕으로 군림했던 '올 블랙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20세기 세계 럭비의 왕으로 군림했던 '올 블랙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팀워크의 중요성 보여주는 럭비

그렇다면 뉴질랜드 사람들이 럭비를 좋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팀워크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긴다. 여러 스포츠 가운데서도 럭비가 팀워크의 중요성을 가장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팀워크를 구성하는 데 남녀 구분을 하지 않는다. 잘 짜인 팀워크는 다문화·다민족 간의 융화는 물론, 뉴질랜드의 국정 운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일련의 요인이 럭비 대중화를 이끌었다. 럭비야말로 뉴질랜드 문화적 정서가 스며든 멋진 공연이라고 여긴다. 럭비는 세계 4대 스포츠로 발전했다. 4년마다 월드컵을 개최하며, 하계 올림픽과 FIFA 월드컵 다음으로 큰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럭비의 종주국 영국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뉴질랜드에 보급됐는지 경로를 살펴보자. 뉴질랜드인 먼로는 1860년대에 영국 런던에서 유학생활을 한다. 그는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럭비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틈만 나면 럭비 경기장에 가서 직접 해보기도 하고 관람도 했다. 몇 년 동안 럭비에 대한 이해와 실제를 경험한 먼로는 학업을 마친 뒤 뉴질랜드에 돌아가 럭비를 보급하기로 결심한다. 1860년대 후반에 학업을 마친 그는 귀국하자마자 럭비를 소개하기 위해 1870년에 뉴질랜드 남섬의 넬슨 지역과 북섬 웰링턴 지역으로 간다. 지역 클럽을 방문해 럭비를 소개한다. 지역민들도 참석토록 해 소개를 했는데, 클럽에서 마련해 준 장소가 비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를 계기로 넬슨 클럽과 웰링턴 클럽은 럭비팀을 만들었고 이듬해인 1871년에 뉴질랜드에서 사상 처음으로 럭비 경기가 열렸다. 이후 뉴질랜드 럭비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100년이 지난 1987년 1회 럭비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 여세를 몰아 2011년 및 2015년 럭비월드컵에서는 2회 연속으로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러한 결과 럭비월드컵 최다 우승팀으로 등극하게 됐다.
 

럭비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시는 축제 분위기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럭비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시는 축제 분위기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1.22

뉴질랜드 럭비의 성장가도엔 슈퍼스타가 있었다. 럭비의 황제로 불렸던 ‘조나 로무(Jonah Tali Lomu)’였다. 그의 역할은 크고 튼튼한 엔진과 같았다. 그는 196㎝의 키에 몸무게가 125㎏이나 되는 거구였다. 농구 선수만큼 큰 키에 레슬링 선수만큼 몸무게가 많이 나갔다. 이러한 체격 조건은 럭비 스타플레이로서 성장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강한 정신력, 뛰어난 순발력에다 스피드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100m 주파 기록이 10.8초를 기록했을 정도다. 단거리 육상 선수만큼이나 빨랐다. 이처럼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가진 그가 공을 갖고 뛰면 상대 선수의 웬만한 태클은 쉽게 무너졌다. 폭풍같이 질주하는 스피드와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럭비 월드컵이 열렸다. 결승전은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결로 결정되었다. ‘조나 로무’의 활약을 저지하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한 정유회사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조나 로무’에게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는 선수에겐 넘어뜨릴 때마다 한화로 1백 2십만 원을 주겠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가 그 경기에서 이룬 대기록으로는 한 경기에서 무려 7개의 트라이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 기록은 최다 트라이로 기록돼 있으며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인간 승리의 감동을 전 뉴질랜드인들에게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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