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오후 늦게 격식을 차린 저녁이 차려졌다. 행정 장교가 건배를 제안했다. 아오키는 한 번에 일본 청주 사케를 입안에 털어넣었다가 동료들이 잔을 홀짝이는 것을 알아챘다. 뉴스 영화 카메라맨이 젊은 조종사들에게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욱일기(떠오르는 태양 깃발)가 그려진 가죽 헬멧을 썼다. 몇 명은 헬멧에 ‘하치마키(머리띠)’를 두르기도 했다. 모두 팔짱을 끼고 힘차게 ‘도키노 사쿠라(동기의 벚꽃)’를 불렀다. 해가 지기 직전 ‘인간폭탄’이라 불리어지는 가미카제(특공대) 비행기에 올라탄 이들은 붉은 색으로 짙게 물든 석양을 뚫고 창공으로 떠올라 오키나와 앞바다에 떠있는 미국 수송선단으로 돌진했다. 폭탄이 터지지 않고 바다에 불시착한 아오키를 제외한 20대 초반의 일본 젊은 군인들은 모두 욱일기와 함께 산화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태평양전쟁을 조망한 미국 역사학자 존 톨런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의 한 대목이 생각난 것은 최근 스포츠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욱일기 사용 논란 때문이다. 지난 주 일본 도쿄 돔에서 연속 2차전을 가진 2019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리그 12슈퍼라운드 한일전서 관중석에 욱일기가 등장했다. 관중들은 욱일기 깃발을 흔들었을 뿐 아니라 욱일기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이들도 많았다.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기는 했지만 욱일기를 든 관중들은 자리를 옮겨가면서 계속 깃발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WBSC에 욱일기가 경기장에 등장한 데 대한 제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WBSC는 “IOC도 금지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욱일기 사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대한체육회는 도쿄에서 가진 도쿄조직위와의 회의에서 2020 도쿄올림픽에 욱일기 사용을 금지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년 도쿄올림픽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욱일기 사용을 제재하지 않는 한 일본 관중들이 욱일기를 흔들며 대규모 응원을 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한일전때마다 등장하는 욱일기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우리 한국인들과 입장 차이를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욱일기는 일본인에게는 말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물 그 자체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아시아를 거대한 형제대륙으로 만든다는 ‘사해동포주의’의 미명아래 태평양을 어떠한 서구의 침략도 허용하지 않는 ‘평화의 바다’라고 명명하고 욱일기를 앞세워 일본 군부는 한국과 중국을 비롯 동남아 국가들의 주권과 영토를 침탈했다. 욱일기는 침략전쟁을 할 때마다, 군인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했다. 각종 군 부대에서 국기 하강식, 장례식 등 공식적인 행사나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욱일기는 애국심과 희생을 강요하는 상징적 도구였다.

일본해군이 무적을 자랑했던 전함 무사시호가 마지막으로 침몰할 때, 선상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의 사진과 함께 돛대에서 트럼펫으로 국가를 연주하면서 16개의 흰 햇살과 16개의 붉은 햇살이 있는 오렌지색 태양이 그려진 커다란 해군기가 실력있는 한 수영 선수 출신의 지원병 가슴 부근에 경건하게 묶여 있었다고 존 톨런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는 설명했다. 욱일기는 전쟁 수행과정에서 19세기 이전의 막부시대의 사무라이와 같이 항상 죽을 준비가 된 전사로 군인들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욱일기는 목숨을 무의미하게 던진 17세기 막부 에도시대 군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870년 메이지 정부의 정책으로 전쟁의 깃발로 채택됐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에는 일본 육상과 해상 자위대에서 현재까지 사용 중인 욱일기는 일본인들에게는 국가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한국 등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게는 강제징용, 학살, 위안부 등 반인권적인 만행을 떠오르게 하는 무자비한 깃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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