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특무기구(特務機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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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명의 헌종(憲宗) 주견심(朱見深)은 서창(西廠)을 설립하고, 심복 태감 왕직(汪直)을 ‘서창제독’으로 임명했다. 연극에 능한 소태감 아추(阿醜)가 취한으로 분장하고 욕을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 황제께서 납신다고 했지만, 전혀 멈추지 않는다. 왕직이 온다고 하자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가 왕직으로 분장하고, 도끼를 든 채 헌종의 앞에 나타났다. 누군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왕월(王越)과 진월(陳鉞)이라고 대답했다. 헌종은 껄껄 웃다가 문득 왕직의 권력전횡에 대한 풍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종은 왕직을 점차 멀리했다.

명초에 주원장은 금의위(錦衣衛)를 세워 자신의 이목(耳目)으로 삼았다. 성조 주체는 태감의 도움으로 정난에 성공한 후 주원장의 금지령까지 어기고 그들을 중용했다. 그는 금의위를 마음대로 부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별도의 특무기구인 동창(東廠)을 개설했다.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창위제도가 등장했다. 창위제도는 명왕조와 운명을 같이 했다. 헌종의 시대에 명은 ‘토목보의 변’과 ‘탈문지변(奪門之變)’을 겪으면서 쇠락해졌다. 뇌물이 유행하고, 조세제도가 무너지면서 토지겸병이 가속화됐다. 헌종은 불안한 정국을 다스리기 위해 서창을 개설했다. 왕직은 헌종이 총애하는 만(萬)귀비의 신임을 얻어 서창의 총관으로 승진했다. 서창의 규모는 동창의 배나 됐다. 친왕들조차 감시의 대상이었으니, 권세는 금의위와 동창을 능가했다. 무고한 사람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민간인까지 감시대상이 확장됐다. 전직내각대학사 양영(楊榮)의 증손 양엽(楊曄)과 그의 부친 양태(楊泰)는 하옥됐다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숙부인 병부주사 양사위(楊士偉)에게 금을 줬다고 허위자백했다. 양씨문중은 멸망했다. 왕직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은 병부상서 항충(項忠)은 모욕을 받았다. 내각대학사 상로(商輅)는 왕직을 탄핵했다가 꾸중을 들었다.

왕직은 흉악한 무리들을 서창으로 끌어들였다. 왕월(王越)과 진월(陳鉞)이 그들이다. 요동순무였던 왕월은 왕직이 명을 받고 변방을 순시할 때 전력을 다해 꼬리를 흔들었다. 잔치를 열고 왕직을 초대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쳤다. 왕직은 그를 더욱 총애했다. 요동에 있던 병부시랑 마문승(馬文升)은 왕직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또렷한 대책이 없었다. 진월을 경계하지 않다가 오히려 좌천됐다. 진월과 왕월은 왕직에게 변방에서 공을 세워 기반을 다지고 승진과 더 많은 녹봉을 얻으라고 권했다. 왕직의 출정은 변경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관리와 백성들을 속이고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 대신들은 여러 차례 왕직의 죄상을 보고했지만, 어리석은 헌종은 믿지 않았다. 두려움이 없어진 왕직은 권력을 농간하며 국가의 화근이 됐다. 왕직에게 피해를 입은 대신만 수 십 명에 달했고, 무고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심복을 승진시킬 기회를 노리던 왕직은 왕월을 병부상서 겸 좌도어사로, 진월을 좌부어사로 승진시켜 요동을 순무하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왕월과 진월을 사람을 죽이는 큰 도끼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에서 말한 연극의 제1막이 올랐다. 왕직의 권세가 전국을 기울게 했지만, 우매한 헌종은 그러한 상황을 조금도 모르고 있을 때, 놀라운 담력을 갖춘 어린 태감 아추는 하찮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정의감이 넘쳤다. 왕직의 사악한 실체를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었지만,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하물며 지위가 높은 대신들까지 황제에게 상주했다가 면박을 당하는 판국에 주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장기를 이용해 왕직의 진면목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묘수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든 제도가 마찬가지이지만, 감찰을 담당하는 특무기구의 건전성은 특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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