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고봉산성 전경
고봉산성 전경

왕봉현 행주산성엔 고와편의 흔적

행주산성을 처음 구축한 시기는 백제 때로 추정된다. 여기서 서북쪽에 있는 작은 산 보루메라는 곳은 자연 토루를 이용, 사람들이 거주했던 고식의 토성지이며 마한 시기까지 시대를 올려볼 수 있다. ‘벽제’이니 ‘계백’이라는 지명은 이 일대가 본래 백제라는 지명을 가진 마한의 고지로 추정된다. 실지로 이곳을 온조가 내려와 처음 백제를 개국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행주산성은 해발 123m의 덕양산 위에 능선을 따라 흑으로 쌓은 성이었다. 그런 형태의 유구가 성 능선을 따라 확인되고 있다. 성벽의 총 연장은 1㎞가량 된다. 성은 내·외성을 갖춘 이중성으로 남쪽은 한강과 맞닿아 고준하며 북편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다. 내성에서는 주로 관리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상정되며 외성에는 군사들과 백성들이 상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 안에는 큰 거주지와 성안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우물지가 있다. 이 주변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계 와편들이 발견된다. 글마루 팀의 답사에도 성내 곳곳에서 삼국시대 와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 도로 옆 절개지에는 백제~고구려~신라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산성의 고대 역사를 이 유물들은 상기시켜 준다. 대첩비 휴게소(충의정)의 북단에서 토루(土壘)로 된 성벽이 이어지며 이 토벽은 1북으로 갈수록 경사가 낮아져서 끝난다. 북쪽의 성벽이 평지와 연결되어 민간거주와 출입구를 생각할 수 있다.

고봉산에서 수습한 삼국시대 토기와편
고봉산에서 수습한 삼국시대 토기와편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부른 고봉산

고봉산은 해발 206m로 고양시 일원에서는 비교적 높은 산이다. 이런 이유로 고봉이라 는 이름을 얻은 것으로 상정된다. 한씨 미녀와 고구려 안장왕의 애틋한 설화가 어리지만 이 산에도 고대의 성터가 남아 있다. 바로 고구려 달을성현을 지키는 보루였다.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고 고봉현. 지금 관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김부식이 이르기를 한씨 미녀가 달을성현 높은 산 위에 봉화를 올려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뒤에는 고봉으로 이름하였다(古 高峯縣 在今治 西十里峯一作金富軾云 漢氏 美女 於達乙省縣 高山頭 然烽火迎安臧王故後 名 高烽).”

안장왕이 계백현을 장악하고 군대를 진주시켰다면 고봉산이 가장 적절한 곳이다. 고구려는 본래 산악에 의지하여 나라를 열었으므로 지대가 낮은 행주산성은 맞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비교적 높은 고봉산에 군사들을 진주시켜 이 일대의 방어를 담당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고봉산은 토성지로 자연의 험차를 이용한 테메식과 포곡식의 혼합 양식이며 곳곳에 판축 유구의 흔적들이 보인다. 주변에서는 적색계통의 고구려 와편이 산란하며 토기편도 수습되고 있다. 백제 흥망의 역사와 고구려 현으로 확실했던 이 일대에 대한 확대된 학술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고봉산에 남아있는 토루
고봉산에 남아있는 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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