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作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인각화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유교사상으로 선비예찬이 만연하던 조선 초기, 선비를 두고 쓸모없다며 호되게 꾸짖는 장군이 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의 얼굴을 그려 건다는 기린각(인각화상)에 탁상공론을 펼치는 선비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대장부 중 누구의 초상을 먼저 그려 넣겠냐며 묻고는 자신의 얼굴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가 있다.

조선 세종 때 충신으로 유명한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할 만큼 호기(豪氣)가 높았다. 아울러 책상머리에 앉아 말로만 애국충절 하는 선비들을 향해 호통까지 쳤다. 당시 김종서는 두만강 건너까지 쳐들어가려 했으나 조정의 문신들이 나라 걱정보다 시기와 모함을 일삼아 만주 회복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대해 답답함과 분한 심정을 시조에 토로했다.

만약 김종서의 뜻대로 두만강 너머까지 여진족을 쫓아내고 쳐들어갔다면 현재 한반도의 북방 국경선은 연해주까지 뻗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김종서는 대장부 중 대장부로 손꼽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문과에 급제한 학자로서, 오랜 세월을 북방개척과 방어에 심혈을 기울이는 장수로서 면모를 보여주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6진 개척과 관련된 상소를 본 허균은 “얕은 지혜와 꾀, 말로만 때워 국가 일을 망친 자들이 기가 막혀 주둥이를 감히 벌리지 못하게 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철두철미한 성격을 지닌 것이다.

압록강변 4군을 개척해 6진을 설치한 그는 항상 작전회의실에 놓인 책상 위에 칼 한 자루를 두었다. 주위 사람들은 책상 위에 칼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혹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이에 장군은 “나태해지려는 내 자신을 베기 위함”이라고 말했단다. 이러한 상황만 보더라도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탁상공론하는 조정을 서릿발같이 호통치고 매사에 당당할 수 있는 까닭은 먼저 자신을 경계하고 다스렸기 때문이다.

삶과 달리 김종서의 마지막은 처참하다. 장군은 반역자로 몰리면서 효시를 당했고, 무덤에는 시신 전부가 아닌 다리 한쪽만이 묻혀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육은 죽일 수 있으나 정신만큼은 수양대군도 어찌하지 못했으리라. 백두산에 기를 꽂을 정도로 대단했던 김종서의 기개와 정신은 약 600년이 흘러도 많은 이들에게 표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