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나 혼자 서울을 출발해 고향에 도착한 시간은 초여름 오후 5시쯤이었다. 형 집 대문을 들어서자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던 구수한 제사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버지 제사를 지내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서른이 넘어도 여직 장가를 못간, 비어 있는 막내 조카 방으로 나는 들어갔다. 돗자리가 깔린 방은 서늘해서 좋았다. 나는 피곤하던 참이라 돗자리 바닥에 등을 붙이고 잠시 잠을 청했다.

얼마간을 뒤척인 상태였지만 쉽게 잠속으로 빠져들지는 못했다. 3년 전에 형과 심하게 다툰 일이 새삼스럽게 고물고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3년 전 환갑을 맞이한 형의 생일날 고향에 내려 왔었다. 그날따라 죽은 작은어머니(아버지의 첩)의 제사 문제로 그와 심하게 다툰 후로 고향에 발걸음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 때 서로 술만 취하지 않았어도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터였다.

바람기가 한창이었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였다. 그가 첩을 끼고 들어오자 친모는 대번에 우리 네 형제를 아버지에게 맡기고 객지로 나가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형은 예민했던 탓으로 평소 작은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친모와 헤어지게 된 우리 형제들은 경제적으로도 곤란을 겪고 핍박 받았다. 그 원인 제공자가 아버지임이 분명한데도 형은 작은어머니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때는 세상 물정 모르고 철이 없는 우리 네 남매 모두가 형의 강경한 분위기에 편승해 다분히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와 친모, 작은어머니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작은 어머니가 낳은, 나에게 배다른 동생 2명이 더 있었다. 큰 동생은 교통사고로 죽고, 하나는 무단히 사이비 종교에 미쳐 집을 뛰쳐나간 뒤 20년째 행방불명이 됐다. 작은어머니의 제사 지낼 사람이 없어진 것이었다.

본처가 엄연히 살아 있는 집에 아버지의 바람기 달변에 속아서 첩으로 들어 왔던 작은어머니의 삶도 기구했을 터였다. 한 지붕 아래서 비록 한솥밥을 먹지만 배다른 형제끼리 티격태격하며 주고받는 다툼도 보았을 테고, 아무리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해도 배 아파 낳은 자식 쪽에 설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갈등도 겪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멀쩡한 처녀의 나이로 무책임한 아버지의 구슬림에 넘어가 시집을 왔었다. 속았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자신의 뱃속에 꿈틀거리는 작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쪼들리는 생활에 6명의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기란 벅찼을 것이었다. 한 여인으로서 처녀 시집을 와 행복이 무엇인지 느껴보지도 못한 채 생활고와 고질병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고 가슴에는 심한 응어리가 맺히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런 작은어머니가 죽은 뒤에 제사 밥도 받아먹지 못한다면 그녀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박복한 신세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어떤 모습으로든 부대낌의 세월 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 아닌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혼이 방치 된 채 슬픈 모습으로 구천을 떠도는 것 같아 항상 마음에 불편함을 안고 있었다. 다툼의 발단은 그것이었다.

이제 당사자인 세 사람 모두 죽고 없으니 슬프고 미웠던 질긴 감정들은 다 묻어 버리고 작은 어머니 제사를 우리 형제가 지내자는 나의 제안은 꺼내자 말자 형에게 묵살 당했다.

“택도 없는 소리 하지마라!”

“우쨌든, 작은어머이도 아부지가 생시에 사랑했던 여자 아잉교.”

일순간 형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형한테 기습적으로 보기 좋게 한 대 얻어터졌다. 나도 맞고만 있을 수 없었지만 그날 덩치 큰 동생이 말리지 않았으면 형제간에 난투극이 벌어질 뻔 했었다. 그 길로 나는 제사도 지내지 않은 채 서울로 직행해 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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