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돈도 힘도 가진 것 없는 서민의 일상은 즐거움보다는 걱정거리에 파묻히기 쉽다. 빈부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사회 복지는 성장 우선 시책을 저 먼 뒷걸음으로 따라 오기 때문에 서민의 삶은 도리어 갈수록 후진(後進)하는 느낌이다.

만성화된 주택난과 전세난, 턱없는 주택가격과 전세가만 해도 그렇다. 우리 위정자들은 집 없는 설움. 살 집을 못 구하는 데서 받는 도시 빈민의 스트레스를 있는 그대로 실감하고 있는가.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나 초원을 헤매는 유목민처럼 자꾸만 도시 변방으로 내몰려 생활 터전에서 멀어지는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대통령은 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대는 시장만을 주로 찾는가. 아무도 손잡아 주지 않는 도시 빈민의 이 안쓰러운 고통의 현장은 왜 안 가는가. 이 고군분투의 외로운 민생 현장을 마주하고 장밋빛 선거 공약이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지 않은가.

국민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정부의 기본 임무 중에서도 기본에 속하는 사항이다. 사람이 비바람과 추위, 더위를 피하고 몸 누일 곳이 없고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주거 문제의 해결, 이것은 공짜도 아니면서 가장 중요한 국민 복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전세 사글세마저 얻어 이사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비명이 되풀이된다면야 어디 민생에 신경 쓴다는 정부의 체면이 서나.

이런 때 맹자(孟子)가 한 말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엉뚱하지가 않다.

맹자는 말했다. ‘천하의 사람과 즐기고 천하의 사람과 더불어 걱정하고서도 임금 노릇 제대로 못한 사람은 없었다(樂以天下 憂以天下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락이천하 우이천하 연이불왕자 미지유야).’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임금이 민심과 눈높이를 맞추고 민심을 살피며 국민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데 어떻게 다스림에 실패한 임금이 될 수가 있겠는가. 우리에게 그런 사람 있는가. 돈도 힘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그들의 입장에서 걱정해주고 근심해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이에 관한 대답이 당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정치와 정부 지도자들이 이 맹자의 말이 지니는 가치를 새삼 진지하게 음미해보는 일은 중요할 것 같다. 전세난 전세 값 폭등에 대한 원성이 지금처럼 이렇게 높던 때가 없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맹자의 활동 시기는 고대 중국의 전국(戰國) 시대였다. 걸핏하면 나라끼리 먹고 먹히며 백성은 다반사로 전쟁과 각종 노역에 강제 동원돼야 하는 천하대란의 시기였다. 이런 때 이 같은 맹자의 말에 진실로 귀 기울일 여유를 가진 군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가 설파한 이 왕도(王道) 정치의 이상(理想)은 비록 당시는 역사의 풍진에 묻혀 있었을지라도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을 섬겨야 하는 지금의 민주주의 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더욱 빛이 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樂以天下할 때인가 憂以天下할 때인가. 국가적 성과나 국민의 일상사에서 더불어 즐길 일이 없진 않지만 아무래도 후진하는 느낌을 받는 어려운 민생을 생각한다면 후자(後者)에 비중이 더 두어지고 후자를 앞세워야 되는 것 아닌가.

민생을 압박하는 것이 어디 주택난 전세난 전세 값 폭등뿐이냐고 한다면 너무 혹독한가. 일부에서는 혹독하고 과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고통 받는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뛰는 생활물가, 들먹이는 공공요금, 보육비와 사설학원비 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운 요인들이 만성적으로 서민 생활을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라는 것은 이 정부 저 정부에서 쓰던 재탕 삼탕 식이 아닌가.

선제적 대응, 예방적 대응, 참신한 원인 요법 같은 것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지 않은가. 경제가 회복됐는데도 계속되는 일자리 부족과 청년 실업 사태의 지속, 소득원 고갈로 가계 부채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은 또 어떤가. 서민 가계에 드리워진 이 시커먼 먹구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 때 정치지도자들이 자신 있게 내건 장밋빛 공약과 정부가 야심차게 제시한 정책은 왜 번번이 빈말이 되어 국민을 실망시키는가.

물론 정부가 만능은 아니다. 세계 어느 일류 국가의 정부도 이런 난제와 싸우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렇지만 진정 맹자가 말한 憂以天下의 지성(至誠)이었다면 무주택 서민이나 도시 빈민이 겪는 주택난 전세난 전세 값 폭등과 같은 고통쯤에서는 벌써 벗어났어야 한다. 예컨대 임대 주택 같은 것을 왜 몽땅 못 지었는가.

만약 정부가 돈이나 땅이 없어 작은 평수일 무주택 서민용 주택을 충분히 지을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면 이게 맞는 말일 수 있는가. 정부가 건설업자의 이해, 집 가진 사람과 무주택 서민의 엇갈리는 입장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집을 못 지은 것이 아니라 안 지었다고 해야 맞는 말 아닌가. 무주택 서민이나 도시 빈민의 고통을 애써 외면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필시 남이 부러워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 한국이 안고 있는 부끄러움이고 그늘이다.

맹자는 또 말한다. ‘왕이 백성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면 백성도 또한 왕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며 백성들의 근심을 근심하면 백성 또한 왕의 근심을 근심한다(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 락민지락자 민역락기락 우민지우자 민역우기우).’

이는 말하자면 지도자와 국민 사이의 오는 정 가는 정이요 체감이며 진정한 소통이다. 정치지도자와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성실성을 발휘하고 최선을 다 한다면 설사 성과가 국민에게 철저히 흡족한 것이 아닐지라도 국민은 믿고 따른다. 오히려 사사로운 걱정을 접고 정부를 걱정하고 도울 것이다. 얼마나 주옥같은 말인가. 우리 정치가 이와 비슷하게만 된다 해도 국민이 무엇을 걱정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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