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부동산 투기는 대부분의 선량한 국민을 ‘루저’로 만들어 버렸다. 돈 놓고 돈 먹는 투기 광풍이 꺼지자 스페인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가진자들’은 대부분 침묵하거나 방조했다. 경제위기가 닥쳐본들 피를 보는 쪽은 언제나 ‘갖지 못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정치적 대안은 없었다. 기득권에 찌든 두 거대 정당은 그들만의 정치기득권을 온전하게 누릴 것만 같았다.

스페인은 프랑코(F.Franco) 독재정권이 끝난 1975년 이후 사회당(PSOE)과 국민당(PP)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치기득권을 독점해 왔다. 운이 좋으면 집권세력이 되고, 설사 망해도 제1야당이 될 수 있는 정치구조는 정치후진국 스타일 딱 그대로였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적 대안과 경쟁 그리고 민생이 들어서 공간 자체가 없었다.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서로 비방하고 대결하면서 스페인 정치를 주도해 왔던 것이다. 그 세월이 스페인 민주화 이후에도 무려 40년이었다.

드디어 2015년 두 거대정당의 독점적 양당체제가 종언을 고하는 큰 변화가 시작됐다. 그 해 12월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집권당인 국민당은 64석이 감소한 123석, 제1야당인 사회당은 20석이 감소한 90석으로 참패했다. 대신 창당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신생정당 포데모스(Podemos)가 20%가 넘는 득표율로 69석을 얻어 단박에 제3당으로 급부상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급진좌파 성향의 포데모스는 국민당과 사회당 독점체제의 앙시앙레짐(ancien regime)을 붕괴시킨 주역이 된 것이다.

그 후 몇 년간 스페인 정치는 상당히 혼란한 시련기를 겪게 된다. 기득권정치의 퇴장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과 연립정부 구성의 어려움은 어쩌면 과도기적 정치과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민 문제와 실업 문제 그리고 카탈류냐 독립 문제 등이 얽히면서 극우와 분리주의 세력이 발호하면서 포데모스도 침체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포데모스는 지역조직을 더 단단하게 다지면서 정치 기득권세력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득표에는 다소 불리하더라도 사회운동세력과의 연대를 멈추지 않았다. 이민 문제와 카탈류냐 독립 문제에 대해서도 초심을 잃지 않았다. 2017년 2월 당대회에서 이글레시아스(P.Iglesias) 대표는 재신임을 받는 자리에서 당의 ‘단합’과 ‘낮은 자세’를 강조했다. 국민 편에 서지 않으면 포데모스도 없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지난 10일 스페인 총선이 있었다. 올해만 두 번째로 치러진 선거였다. 정치혼란이 반복되면서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총선을 치른 것이다. 그러나 포데모스는 7석을 잃으며 전체의석 350석 가운데 35석으로 제4당에 만족해야 했다. 제1당인 사회당도 3석이 줄어 120석에 그쳤다. 반면에 제1야당인 국민당은 22석이 늘어난 88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다. 극우노선의 복스(Vox)는 돌풍을 일으키며 52석으로 제3당으로 뛰어 올랐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의석 한 석 없던 복스였다. 전체적으로 사회당과 국민당이 여전히 1위와 2위를 다투고는 있지만 포데모스와 복스 등 새로운 정치세력의 도전이 오히려 돋보인다. 양당체제가 붕괴되고 다당체제가 구축된 오늘의 스페인 정치지형은 이제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과반의석을 가진 정당이 쉬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쩌면 정치불안은 감수해야 할 부담이었다. 바로 직전에도 연립정부 구성이 어려워 이번에 다시 총선을 치렀지만 이번 총선에서도 연립정부 구성이 어려운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즈음이었다. 총선 이틀 뒤인 12일 사회당 산체스(P.Sanchez) 대표(임시총리)와 포데모스의 이글레시아스 대표가 전격적으로 연립정부 구성에 대한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사회당과 포데모스가 연립정부를 구성할 경우 소수 세력을 더 규합해야 한다. 두 정당을 합칠 경우 155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반 의석(176석)에 21석이 부족하다. 물론 일부 소수 세력을 규합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포데모스는 당당히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집권당 반열에 오르게 된다. 창당 5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스페인 민주화 이후 최초의 연립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정치지형의 변화 치고는 엄청난 변화가 스페인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한 날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사회당의 경륜과 포데모스의 용기가 결합했다”고 선언했다. 연립정부가 완성될 경우 부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글레시아스 대표에게는 지난 5년간의 포데모스 역사가 짠한 울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거대 양당체제에 도전장을 던진 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겠는가. 때론 함께 박수를 치며 즐거웠던 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민생 현장은 분노와 비난 그리고 눈물이었을 것이다. 스페인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오늘의 포데모스를 지키며 가꾸어 왔던 ‘동지들’의 열정과 용기에 마음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다.

스페인은 올해만 두 번, 최근 4년 동안 네 번의 총선이 실시될 만큼 정국이 불안정하다. 잠시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기도 했다. 사회당과 포데모스가 이번에 전격적으로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한 결정적인 배경이다. 그러나 ‘포데모스의 꿈’은 아직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한 손은 여전히 기득권세력인 사회당의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또다른 기득권세력인 국민당이 재기에 성공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 복스까지 기세를 올리고 있다. 포데모스가 조촐한 축배를 들기에도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인다. 당분간 ‘포데모스의 용기’가 더 절실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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