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초기 하남위례성은 어디인가(1)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초기 하남위례성은 어디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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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하남에 숨겨진 백제 초기 역사

이성산성 정상
이성산성 정상

감일 지구에서 백제 초기 석실분 무더기 발견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처음 왕도로 자리 잡은 위례성(慰禮城)은 아리수 북쪽(河北)이었다. 왕이 고구려 땅을 탈출, 남하하여 부아악(負兒岳, 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광활한 토지와 한강이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온조는 한강변에 위례성을 쌓고 국가 토대를 구축한 후에 하남으로 이도(移都)한다. 당시 주변에 있던 낙랑과 말갈의 잇단 침공이 왕도를 옮긴 주요 원인이 될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미루어 본다면 낙랑은 위례성의 동쪽에, 말갈은 북동쪽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온조는 자주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과 낙랑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북 위례성은 방어에 완벽을 기할 수 없었다.

하남 위례성 시기 백제는 더욱 강성해질 수 있었다. 백제는 300여 년을 하남에서 보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는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힘들게 대처하던 고구려를 공격, 치명타를 가하고 왕도를 다시 하북 위례성으로 옮긴다. 백제가 대국으로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는 하남 위례성은 비좁은 데다 북방공략에 걸림돌이 많았던 것 같다. 늘어난 왕도 안의 보민을 위해서 유사시 요새가 필요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필자는 이 시기 하북 위례성의 위치를 아차산 아래 광진구 일대의 땅으로 비정한 바 있다(글마루 2017. 10월호). 그리고 인공호수인 건국대 일감호를 진사왕대 조성한 궁원유적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온조왕에서 근초고왕 시기까지 백제의 왕도가 되었던 하남 위례성 그 위치는 어디일까. 아직도 학계는 하남 위례성에 관해서는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016년 하남시 감일 지구 택지개발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백제 초기 왕도 주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석실 고분군이 30여 기나 찾아진 것이다. 이 유적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일까. 오늘은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되는 하남시 춘궁면 일대 유적과 이성산성을 여행해 보자.

삼국사기 기록의 혼란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유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10신이 간하기를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고악에 의거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서쪽으로는 대해에 가로막혔으니 그 천험의 지리를 이루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이룩하는 것이 좋지 않으리까?(十臣諫曰 有此河南之地北帶漢水 東據高嶽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地勢 作都於斯)”

그리고 온조왕 41년 조에는 위례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그 동원된 사람들이 동북쪽의 15세 이상 장정들이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모든 고을 사람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축했다(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온조왕대 기록에는 하남 위례성과 또 하나의 위례성이 별도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온조왕 8년 말갈이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10일이 경과하자 말갈군은 퇴각했다. 그러다 13년 5월 어머니 소서노가 죽자 왕은 한수 남쪽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7월에는 한산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민호를 옮겼다고 돼 있다. 여기서 하북과 하남 위례성의 위치가 헷갈리는 것이다. 왕이 하남 위례성과 위례성(하북) 두 개의 왕성을 경영한 것이다.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에도 백제의 왕은 동서(東西) 두 개의 성에서 기거한다고 돼 있는 것을 보면 그 시초가 위례성의 예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부여 천도기에도 부여 부소산과 공주 공산성을 왕성으로 이용한 예와 같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에 근거한 ‘직산설(稷山說)’을 수용했다. 직산설의 근거가 되는 위례산성(慰禮山城)은 충남 천안시 입장면 위례산(해발 523m)에 축조된 산성이다.

그러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었으며, 한강 남쪽의 광주지역(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는 하남 위례성이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고(故) 이병도 박사 등이 다산의 설에 동조하여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많은 학자가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의 몽촌·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하였다. 몽촌토성은 남북 길이 750m, 동서 길이 500m, 전체 둘레 2285m, 넓이 약 44만㎡에 이르는 토성이다.

성은 본성(本城)과 외성(外城)인 이중성으로 확인되었다. 그동안 여러 대학 학자들이 연구를 통하여 성 외곽 둘레에는 방어용 하천인 해자(垓字)시설과 성의 방비를 위한 목책(木柵) 구조물이 있음이 밝혔다. 풍납토성 유지에서는 제사시설도 확인하였다. 특히 백제 초기 중국과의 교류를 밝혀줄 여러 생활유물들이 찾아졌다. 이 중에는 백제 초기 건축물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와당도 조사됐다. 그러나 아직도 풍납 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단언하기는 부족한 점이 많다. 결정적인 유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산 표지석
이성산 표지석

하남시 춘궁·교산동 유적 비밀

하남시 춘궁동 교산동 일대를 하남 위례성의 중심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춘궁동은 옛날부터 ‘궁안’ 또는 ‘궁말’ 등이라고 불렸다. 이 지역은 동남 방향으로 검단산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이성산성과 마주하고 있다. 검단산은 해발 658m의 높은 산으로 20년 전에 정상 부근에서 고대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온조가 일찍이 부아악에 올라가 산세를 볼 때 동쪽으로 험한 산이 중첩되었다는 산악이 혹 검단산이 아닌가.

춘궁·교산동은 고대인들이 주요한 건물을 조영했던 ‘태양의 길’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주목된다. 태양의 길에 관해서는 일본 학자들 사이에 많이 연구되어 왔으며 이들은 경주 석굴암–동해구 감은사지-대왕암의 배치도 이런 예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산동 유적은 동남쪽으로는 검단산, 서북쪽으로는 일자산–풍납토성-건국대 일감호-장안평과 일직선상을 이루고 있다. 이 일직선상에 백제 고대 유적이 자리 잡은 것은 매우 흥미롭다.

글마루 취재단은 춘궁동 궁안 마을과 주변 일대를 조사했다. 이 마을 덕풍천 주변에 고대의 토루로 보이는 다수의 흔적을 찾았다. 이 토루는 자연 지세를 이용한 것으로 주변 대지보다는 높고 외적의 감시와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시설이 될 수 있다. 춘궁동 여러 토루는 동남쪽에 옹립한 객산(해발 292.1m)과 연결되어 있으며 만남의 광장까지 연결되고 있다. 중간마다 끊어진 곳이 있으나 항공사진을 통해 보면 완전히 방형을 이루고 있다. 객산에서 쥐봉에 이르는 능선에는 고식의 토루가 발견됐다. 이 토루는 춘궁동의 동남방을 방어한 시설이다. 이 토루에 대한 정밀 조사도 필요하다.

춘궁동에는 천왕사지(天王寺址)로 불리는 절터가 남아있다. 왜 천왕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일까. 백제는 왕도를 짓고 궁성 안에 사찰을 조영 할 때는 천왕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 상례다. 부여읍 구아리(舊衙里)에 있는 천왕사지에서는 천왕(天王) 명문기와가 나왔다. 이는 왕실사찰이란 뜻이다.

이 같은 사례는 일본 고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사까 시텐오지(四天王寺)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가 요메이천왕 2(568)년에 발원하여 나니와(難波)에 있는 아라하카무라(荒陵村)에서 착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왕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절이다. 하남 천왕사는 조선 시대까지 향화가 올려 졌음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규모도 약 6만㎡에 이르는 큰 사찰이었다. 이곳에서는 사찰에서 쓰였던 주초석, 장대석, 연화좌대 등이 산란하고 있다.

주목되는 지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사창동(上司倉洞)과 하사창동(下司倉洞) 등도 마찬가지. 이 이름들은 왕궁의 곡식 등을 저장하던 창고와 연관되는 것은 아닌가. 항동(巷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항(巷)’은 마을 또는 시가의 안길이라는 뜻이다. 고골저수지에서는 동사지(桐寺址)가 자리 잡고 있다. ‘고골’이란 옛 고을이란 뜻이다.

하남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천황사지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과 좌대(불상은 재현한 것)
하남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천황사지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과 좌대(불상은 재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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