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겹 바리케이드로 차단..시내 일상 되찾아

(카이로=연합뉴스) 이집트 반정부 시위 사태가 만 2주일째 접어든 7일 카이로 도심의 타흐리르 광장은 20여 년 전 한국의 민주화 시위 성지였던 명동성당을 연상케 한다.

오마르 술레이만 이집트 부통령과 야권 대표자들 간의 협상에서 헌법 개정을 포함, 여러 가지 개혁 조치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튿날인 이날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여전히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군인들은 타흐리르 광장 외곽에 4∼5겹의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신원과 소지품을 일일이 확인한 뒤에야 길을 비켜줬으나 광장의 시위 광경이 보이는 슈라 위원회(이집트 상원의회) 앞 도로부터는 더 이상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자증을 숨기고 현지에서 발급받은 운전면허증을 제시하며 어렵사리 접근한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서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광장 쪽 시위대와 합류하려고 군인들에게 항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집트 국기를 상징하는 3색이 들어간 모자 등을 쓴 청년들은 무장한 군인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앞에서 "우리는 안 떠난다. 무라바크는 떠나라", "가말(무바라크의 아들), 아버지에게 얘기해. 이집트인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등의 구호를 잇따라 외쳤다.

이집트 국기와 여러 가지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어지럽게 펄럭이는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수천 명의 시민이 10여 일째 텐트 등에 의지해 노숙을 하며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시위 때 명동성당에서 점거 농성을 했던 대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경찰이 시민들의 명동성당 접근을 차단했던 것처럼, 이집트 군인들은 타흐리르 광장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그곳의 시위대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 인근에서 만난 술레이만 압두 알-칼리(37) 씨는 `정부와 야권 간의 정치개혁 합의가 이뤄졌는데도 시위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면서 야권 인사들의 대표성을 부인한 뒤 "무바라크가 물러나는 게 먼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규모 무역업을 하다가 최근에는 사업을 접었다는 그는 "무바라크의 부패한 각료들은 이집트 경제를 망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최대 야권그룹인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야권 단체 대표자들은 전날 술레이만 부통령과 만나 발효된 지 30년 된 비상계엄법을 폐지하고 개헌위원회를 구성, 내달 첫째 주까지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내용 등에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4.6청년운동' 등 이번 시위를 주도한 그룹과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등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이 엘바라데이 등을 협상 테이블에서 제외해줄 것을 술레이만 측에 요청했다는 얘기도 정부 측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등 야권의 분열 조짐 내지는 입장 차들이 서서히 노정되고 있는 상황도 어디선가 본듯한 모습이다. 기득권 측이 야권과 시민들의 입장 차이들을 겨냥, 분열을 조장하려는 한다는 소문 역시 마찬가지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불과 몇㎞만 벗어나면 카이로 시내는 시위 사태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감자와 토마토 등을 파는 노점상들도 되돌아왔고, 시장은 장을 보는 사람들도 가득 찼으며, 주유소들도 대부분 정상영업을 하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들어와 있던 탱크와 장갑차도 미국과 이스라엘 대사관, 외곽순환도로 일부 구간 등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 대부분 철수했다.

카이로의 국제학교들도 이미 문을 열었거나 열 채비를 하고 있다. 미국계 국제학교인 CAC는 지난 6일부터 부분적으로 수업을 재개했으며, 대표적인 영국계 국제학교인 NCBIS는 오는 13일부터 정상 수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시위 사태를 적극 보도해 국내.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알-자지라 방송의 지국은 여전히 당국에 의해 폐쇄된 상태며, CNN 등 일부 서방 언론매체는 신변 위험 등 때문에 앵커가 철수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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