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이마르의 국립극장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아트 퍼포먼스 '함께 오르는 벽' 행사가 열려 사람들이 독일 시인 괴테와 실러 동상 앞에 임시로 설치된 벽 앞에 모여 있다. (출처: 뉴시스)
독일 바이마르의 국립극장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아트 퍼포먼스 '함께 오르는 벽' 행사가 열려 사람들이 독일 시인 괴테와 실러 동상 앞에 임시로 설치된 벽 앞에 모여 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이온유 객원기자] 9일이면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꼭 30주년이다.

베를린장벽 붕괴가 지금 현재 독일 국민에게 어떤 의미였고, 70년 이상 분단 상태인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BBC는 7일(현지시간) 30년 전 붕괴된 베를린 장벽은 현재 미국 우선주의와 분열되고 있는 유럽에 분명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며, 베를린 장벽 붕괴는 총 한 번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낸 명예로운 혁명이라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협과 테러에 묵직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도했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이 설치돼 있던 곳에서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향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유명연설을 하며 냉전시대에 대한 갈등을 풀고 이념으로 금이 갔던 분열보다는 화합과 적극적인 제스처로 손을 내밀었다.

또한 당시 독일 통일의 아버지 헬무트 콜 총리는 강한 국가 경제력과 외교역량을 앞세워 유럽 국가들과 소련과 대화했고, 당시 고르바초프 서기장도 통일된 독일이 구소련의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파트너로 윈윈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독일 통일은 소련의 승인과 미국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혁명이라고 외교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무엇보다 동독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서독의 세계 최고 수준 경제력이 밑바탕에 깔리고 미국의 지지가 있었지만 통일 과정에서 동독 국민의 통일에 대한 요구가 분출되지 않았다면 베를린 장벽 붕괴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한반도 정세에서는 통일은 안갯속이다. 북한은 체제 보장을 위해 비핵화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협상이 불발되면 언제든지 돌변할 태세다. 또한 북한 주민은 신변의 위협이 두려운지 통일을 향한 혁명은 커녕,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탈북하는 거 외에는 체제 비판에 대한 별다른 액션도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독일은 강한 경제대국으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BBC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는 시민의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장벽 개방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장벽 개방은 동서독 주민의 왕래를 더욱 활성화시켰다고 전했다.

BBC에 따르면 베를린 장벽은 유럽이 둘로 나뉘어질 때인 1961년에 지어졌다. 벽 자체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거의 30년 동안 나눈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은 영국, 미국, 프랑스, 소비에트 연방을 포함한 서방 국가 그룹인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연합국은 독일의 통제권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기로 결정했다. 각 국가마다 다른 책임을 맡은 것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가 독일 서부의 지역을 점령하고 소련이 동쪽을 지배했다.

독일의 분열은 곧 냉전시대를 상징했고 냉전은 동서로 40년간 갈등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서독 주민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이와 반대로 동독 주민은 사람들의 행동 방식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그들이 한 일을 감시받는 체제 속에서 숨막혀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둔 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 내 한 건물 외벽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독일민주공화국(GDR:구동독) 말기 사람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비디오로 비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과 서방 3개국의 분할점령 지역인 서베를린 경계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1989년 11월 9일 철거되고 약간의 기념물만 남겨졌다.  (출처: 뉴시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둔 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 내 한 건물 외벽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독일민주공화국(GDR:구동독) 말기 사람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비디오로 비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과 서방 3개국의 분할점령 지역인 서베를린 경계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1989년 11월 9일 철거되고 약간의 기념물만 남겨졌다. (출처: 뉴시스)

베를린 장벽의 길이는 155km(96 마일), 높이는 4미터, 1989년에는 302개의 망루가 있었다. 실제로 서로 평행하게 두 개의 벽으로 구성돼 있었고, 동독 사람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24시간 감시 체제를 지탱했다. 그것은 서구와 동구 사이의 유럽 분열의 상징이 되었으며 ‘철의 장막’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소련이 동유럽의 많은 국가를 통제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동독 출신 수천명의 사람이 성벽으로 가서 경비원에게 문을 열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의 주요 광장인 알렉산더 플라츠(Alexander platz)에서 백만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독 내각은 시위 후 며칠 안에 사임했다. 11월 9일에는 수천명의 동독 주민이 베를린 장벽을 넘기 시작했으며 국경 수비대는 상부의 지시 속에 총기 없이 곤봉만 든 채, 동독 주민의 기대치 못했던 행동을 그냥 제지 없이 무심코 바라보기만 했다.

11월 10일에는 성벽이 무너지자 많은 사람이 3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친구 및 가족과 재결합했으며,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로 재결합하게 된 과정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지난 9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통일 이후 동·서독 격차는 크게 줄었다. 통일 당시 동독의 경제적 수준은 서독의 43%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75% 수준까지 상승했다고 전하고 있다.

여전히 동독 지역 출신은 서독 지역 사람에 비해 다양한 방면에서 제약을 받고 스스로를 2등 국민으로 여긴다는 반응도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다. 더불어 최근 폼페이오 장관이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하며 나토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유럽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BBC는 7일(현지시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나토가 ‘뇌사’에 빠졌다고 경고했다며 유럽이 더 이상 미국과의 동맹에 의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이어 유럽이 위기에 처해질 수 있다며 마크롱 대통령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인식을 같이하며,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유럽 홀로서기론’에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7일(현지시간)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지역에서 병력을 빼내 터키의 침공을 방조한 점을 두고 “다른 나토 회원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지속적으로 유럽 회원국들이 2014년 합의한 나토 방위비 분담금(각국 국내 총생산의 2%)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나토에 투입하는 돈과 인력을 꾸준히 늘렸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동맹이 미국 보호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나토를 ‘무용지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지난 2015년 체결된 파리 기후협약 탈퇴를 공식화했으며 지난달에는 유럽 동맹들과 상의 없이 시리아 북동부 미군 철군을 전격적으로 발표하며 EU와 사이가 벌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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