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윤노성 강원도 양구 고구려 광개토대왕 역사의 비밀을 품다(1)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윤노성 강원도 양구 고구려 광개토대왕 역사의 비밀을 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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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고지도상의 비봉산(위-동요비고, 아래-해동지도)
고지도상의 비봉산(위-동요비고, 아래-해동지도)

북한강 어구를 지킨 백제의 윤노성

강원도 양구는 본래 백제 땅이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중국 吉林省 集安縣 通溝)에 기록된 여러 곳의 백제 정복성 가운데 ‘윤노성(閏奴城)’이 나온다. 바로 윤노성이 양구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윤노성은 백제의 현(縣) 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 것 같다. 광개토대왕이 58성 700여촌을 점령하면서 나중에 능을 지키는 연호(烟戶)까지도 윤노성에서 징발했기 때문이다. 수묘 연호는 고구려 종족과 출신지가 다른 구민(舊民), 신래한예(新來韓濊)의 두 집단으로 편성되었다. 연호 가운데 고구려 구민은 10, 정복지 신민은 100이었다고 하니 윤노성에서는 최소한 100인이 차출된 셈이다.

윤노성은 고구려 정복 이후 고구려식 이름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요은홀차(要隱忽次)다. ‘요은’은 윤노와 발음이 같고 홀차(忽次)는 고구려 식으로 성(城)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은홀차는 신라 통일 이후 양록군(楊麓郡)이 되고 나중에는 양구(陽口)라고 불려진다. 홀차란 바로 구(口)를 뜻하는 것으로 신라 통일 이후 한자를 차자(借字)하면서 여러 곳에서 이같이 다르게 쓰여진 지명을 찾을 수 있다. 경기도 안산은 고구려의 고사야홀차(古斯也 忽次)로 불렸으며 후에 장항구(獐項口)가 되었다.

백제의 땅 윤노성은 약 400년간 백제문화를 포용하면서 살았다. 그렇다면 인근 화천군에서 대단위 백제 취락이 발견되듯 많은 백제 유적이 나와야 한다. 어디에서 백제유적을 찾을 수 있을까. 양구는 파로호 인근 유역에서 구석기 유적이 찾아진 이후 역사시대 조사 연구가 안 돼 있었다. 성지나 고분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구읍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산과 들에서 고대 백제, 고구려 유적이 다수 발견될 개연성이 있다. 비봉산, 도솔산, 군량리, 고대리 등 지명은 고대 유적과 관련 있는 것들로 생각된다. 윤노성, 요은홀차의 향기가 어린 고대 역사의 심장 양구로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강국 백제의 부상

강국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시기 완성된다. 왜 이때 백제가 가장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한 것일까. 온조왕 시기부터 비옥한 마한 땅을 병합한 백제는 철기로 무장, 중앙집권적 국가조직을 이뤘다. 한강 중심에서 위로는 낙랑의 고지인 황해도 전역까지 대동강을 위협하는 위력을 보였다. 남쪽으로는 마한의 고지인 전라도 지방까지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상정된다. 이 시기 전남지역 일대에서 발굴되는 지배층의 금동관 등 유물을 보면 당시 완성된 담로(擔魯)체제의 증거로 해석되는 것이다.

담로란 본래 백제어 ‘다라’ ‘드르’의 음차(音借)로서 ‘성(城)’을 의미한다. 양서(梁書) <백제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존재했다고 돼 있다. 또 남제서(南齊書)에는 백제왕이 신하를 왕이나 후(侯)에 봉한 기사가 있어 봉건영지(封建領地)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일본으로 다량의 철기를 수출하여 부를 축적했으며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다. 일본은 정례적으로 사신을 보내 진귀한 보물을 바치고 백제는 이들에게 중요한 보물을 내렸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칠지도(七支刀)로서 백제의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이때 고구려는 중국 북방민족 연(燕)의 남침으로 방어에 힘쓰느라 백제의 위세를 미리 막지 못했다. 고구려를 침공한 연은 왕의 부친인 미천왕의 시신을 강탈한다. 특히 이들에게 모후(母后)마저 포로로 잡히는 가장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다. 고국원왕은 결국 신하의 예를 취한 후 부친의 시신과 모후를 돌려받았지만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는 백제의 기세에도 전전긍긍했다. 백제와의 전쟁은 고국원왕 39(369)년 9월이다. 왕이 직접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백제 북변인 치양(雉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고구려는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면 ‘치양’은 지금의 어디일까. 황해도 연백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년 후 백제 근초고왕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고국원왕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백제군을 막았다. 그러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운명하고 말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왕을 고국의 들에 장사지낸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6 ‘三十九年秋 九月 王以兵 以萬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來攻平 壤城 王出帥拒之 爲流矢所中十月 二十參日薨 葬于故國之原云云’)

이 시기 북한강 유역은 백제의 굳건한 땅이었다. 강원도 양구, 인제, 철원을 비롯 강원도 전역까지 잔존한 말갈세력과 대치하면서 평화를 유지했다. 그런데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 국경은 불안하기 시작했다.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은 기병 5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성을 공취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백제의 기를 꺾고자 하는 의지가 담겼다.

또 하나는 백제가 왜(倭)와 연합하여 신라 왕경을 위협해 그대로 두었다가는 위협이 되는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비문을 보면 수군까지 합세, 서해에서 한강으로 세력을 넓혀 백제 수도를 압박했다고 돼 있다.

비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양구군 관내
비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양구군 관내

고구려비에 나오는 백제의 윤노성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여러 성을 공취했다고 돼 있다. 5만병력이 파죽지세로 백제의 북변을 차례로 공취하고 신라, 가야 땅까지 내려갔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壹八城 臼模盧城 若模盧城 幹弓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조)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彌城 奧利城 勾牟城 古須耶羅城 …分而耶羅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婁賣城 散那城 ○婁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至城 林城 …就鄒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三穰城 …○○○羅城 仇天城 …云云(중략)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云云.

고구려 수군은 서해를 통해 한강으로 올라오고 육군은 철원, 연천, 포천을 거쳐 북한강 유역으로 진입, 양구를 거쳐 강릉까지 진공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최범영 연구원도 한 신문의 기고 글에서 광개토대왕의 공격로를 ‘금성~발성~화천~양구~관노성~삼척’으로 상정했다. 금성은 초기 고구려군이 백제를 쳐들어온 ‘안협’이나 ‘승량’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고구려군이 처음에 승량에서 경기도와 강원도 방면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렀던 것으로 상정했다.

광개토대왕의 첫 공취성은 18성으로 그 하나가 윤노성이다. 이 때 한강변에 있는 아차성, 고모루성이 나온다. 아차성은 지금의 서울 워커힐 윗 산이며 고모루성을 일부학자들은 남한강 국원성, 지금의 충주로 비정하고 있다. 아차성에서는 이미 고구려 보루가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햇빛을 보았으며 윤노성이 <삼국사기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을 통한 지명연구를 통해 양구로 확실시되고 있다. ‘윤노’를 어문 학자들은 욘고치 즉 요은홀차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론은 없다.

<여지승람> 양구현 건치 역혁조에 보면 ‘양구현. 본래 고구려의 양구군이다. 요은홀차라고도 한다(本高句麗 楊口郡 一云 要隱忽次)’라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대왕의 5만 군사가 양구를 엄습해 올 때 백제는 얼마나 저항했을까. 주변의 대부분 성들이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에 속수무책 항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삼척, 강릉까지 점령하고 동해를 따라 경주로 진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윤노성은 고구려에 의해 요은홀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치소를 삼아 주변 여러 곳을 통치하는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상정된다. 조선 세종 때 인근 방산현(方山縣)을 속현으로 삼았다는 기록(<여지승람> 양구현 속현 조)을 보면 전대의 구례가 적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비봉산 전경
비봉산 전경

비봉산은 천 수백년 양구 수호의 진산

양구의 진산 비봉산(458m)은 양남팔경의 하나인 ‘비봉조양(飛鳳朝陽, 비봉산의 해돋이)’으로 유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봉산은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관동지>에는 ‘도솔산(兜率山)에서 이어진 산줄기이며 본 현의 진산이 된다. 관문에서 2리쯤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비봉산은 도솔산과 함께 양구의 주요 지맥임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에도 ‘본현의 도솔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에 있는 산이며, 본 현의 진산이다. 관아로부터 2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봉산은 <해동지도>를 비롯 1872년 지방지도 등 옛 지도에 모두 표시되어 있다. 또 <동국여지도> <동국지도> <동여도>와 같은 강원도 지도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등의 전국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양구의 대표적 명산으로 회자된 셈이다.

고려 명종 때 뛰어난 문장가였던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는 양구를 유람하다 다음과 같이 비봉산을 노래했다.

“붉은 해가 아직 바다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흰 안개는 오히려 산에 잠겼네/ 새벽밥 지어먹고 문득 동쪽으로 달리노니, 길이 매우 험난하도다/ 고개의 잔도(棧道)는 높고 가파른 데를 뚫었고 시내의 징검다리는 졸졸 흐르는 시내를 통과한다/ 험한 산길을 애써 지나 푸른 기슭에 오니, 동구가 점점 넓고 조용해지네.”

비봉산은 현대에 들어서 양구주민들에게는 힐링 장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산 정상에서부터전망대까지 능선을 따라 일부 평평한 곳에 체력 단련 시설을 갖추었으며 등산로도 잘 닦아 오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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