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충주 칠금동 백제유적 발굴조사 부지
충주 칠금동 백제유적 발굴조사 부지

고대 철기 왕국 백제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모두 678년의 역사를 지닌 왕국이다. 백제 멸망 후 3년간 처절한 항쟁을 하였으므로 멸망 시기를 663년(豐王 재위3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다. 남조문화를 받아들여 삼국 중 가장 정교하고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해상 왕국이었다. 건국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며 고구려 주몽의 후비인 소서노와 아들 비류·온조 형제가 남하하여 마한의 영토를 임시 빌어 개국했다. 온조는 처음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했는데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의 수가 10명인 데서 붙여진 것이다.

십제국은 한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한 높은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다 마한의 영토를 점점 잠식하고 나중에는 마한의 수장국인 목지국(目支國, 지금의 안성)을 사실상 점령함으로써 광대한 마한 여러 나라를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국호도 백제라는 마한국의 이름을 계승한다. 백제는 점점 한반도 중부 서해 남부 지역으로 영역을 넓혀 비옥한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급속히 강성해진다. 특히 중부지역에서 찾아진 철광으로 인해 우수한 철기를 제작했으며 이는 백제 강국의 디딤돌이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진한조(辰韓條)에도 “모든 무역에는 철을 화폐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원삼국시대부터 철이 화폐로서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기록에는 181년경 초고왕 때 곡나 철산(谷那鐵山)에서 산출된 철을 일본에 가져간 것으로 되어있다. 곡나 철산은 이미 2세기부터 일본의 주요 철 수입 지역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백제와 가장 긴밀하고 가까운 나라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백제 지역의 철기 유적은 가야지역보다 더 많이 조사되고 있다. 백제 중심인 안성, 진천, 충주, 보은, 청주지역에서이다.

충주 주덕일대는 일찍이 가야인들이 웅거했던 임나국(任那國, 대동지지)으로 가야와 더불어 주요 철기 생산 지역이었다. 왜 가야인들이 주덕일대에 웅거하여 산 것일까. 이들은 진흥왕의 중원지역 진출 이전에 요도천이나 탄금대를 중심으로 철기를 생산하고 산 가야인들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가야와 백제는 가장 친밀했으며 백제 성왕 시기 옥천 관산성 신라와의 전투에서도 연합하여 대응한 기록이 있다.

충주 칠금동 유구배치도(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 칠금동 유구배치도(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주덕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 이름이 ‘요도천’이다. 이 냇가 주위로는 지금도 많은 양의 철제련과정에서 나오는 슬러지가 수습된다. 재미있게도 일본 오사카에 가면 요도강(淀川, よどがわ)이 있다. 주덕의 요도천과 요도강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야 사학자 가운데 일부는 주덕의 철기장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정착하고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고국 임나의 요도천을 그리워 한 나머지 같은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고 상정한다. 오사카 요도강 주변은 고대 일본 국가의 발생지다.

혹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의해 중 원지역(미을성, 국원성)이 점거되자 임나국 철기장인들은 한강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한 것은 아닐까. 이들은 일본으로 가면서 많은 양의 철기를 가져갔을 것이며 기술자들은 일본 오사카에 정착하면서 고대국가를 세우는 결정적 일에 간여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신 응신천황(應神天皇, おうしんてんのう)은 철기를 잘 다룬 한반도 도래인일 가능성이 크다.

주덕지역은 고구려에 의해 신라 진흥왕대 의해 복속당한 후 철광은 잘 보존되었으며 남은 잔존세력은 우대를 받았던 것 같다. 일부 가야인들의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당시 가야금의 명인이었던 우륵도 가야 진영에서 진흥왕에 의해 찾아진 것이다. 우륵 음악을 인정하고 그를 국원에 안치한 후 특별히 장려했다는 <삼국사기> 열전 기록은 진흥왕의 임나국 세력에 대한 충분한 격려와 보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무열왕 때 문장가 강수(强首)가 “신은 본래 중원경 지역의 임나가량(臣本 任那加良人 名字牛頭) 출신이었다”고 얘기한 기록을 보면 가야인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세거했음을 알려준다. 고려 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에 보면 ‘중원과 해주의 철은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철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고려 시대까지도 중원 일대에는 대규모 철산지가 널려 있었다는 증거다. 고려 시대 다인철소는 가장 유명한 곳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충주 철에 대하여는 충렬왕 3(1277)년 4월에 원(元)에서의 환도(還刀) 천 자루를 요구하자 고려에서는 이것을 충주에서 주조케 한 사실이 있다.

고종 42년에는 몽고군 침입 시 다인철소의 사람들이 남산성에서 이를 물리쳐 공을 세운 일이 있다. 소(所)란 천민들이 사는 특수지역. 이 공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되었다. 어떻게 보면 다인철소 유적은 한국철기문화의 메카 격이며 과학 사적이다. 국난극복의 사적으로도 평가해야 할 일이다. 이 유적지를 가능한 보존하는 것도 이 시대의 책무라고 생각된다.

부연마을
부연마을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