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칠금동에서 다수 철기 유적 발굴

충주 칠금동 백제 철 생산유적 전경(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 칠금동 백제 철 생산유적 전경(제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아, 백제의 신기 칠지도

칠지도는 일본 석상신궁(石上神宮, いそのかみ)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백제 칼이다. 일본은 이를 성보(聖寶)로 취급하여 1953년에 국보 고고 자료 제15호로 지정했다. 길이 74.9cm, 61자의 금 상감 명문이 새겨진 칠지도는 가지가 일곱 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칼을 두고 한·일 역사학계는 아직도 해묵은 논쟁으로 삼는다. 한국 측은 백제에서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하고, 일본은 진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견고한 선철을 단조하여 만든 칼의 외면에 상감 되어 있는 글씨를 두고 이 같이 해석이 다른 것이다.

泰○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뒷면)

“태○ 4년 11월 16일 병오 정양에 백 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후왕에게 줄 만하다.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奇生聖音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한국 학계는 칠지도는 백제가 가장 강성한 시기였던 근초고왕~전지왕 시기 제작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칼은 어디서 제작된 것일까. 일본서기에 이 칼의 출신지가 기록된다. 즉 신공황후(神功皇后)조에 신공황후 섭정 52(252)년 가을 9월 병자(丙子)일,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 1개, 칠자경(七子鏡) 1개, 각종 중요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의 나라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근원은 곡나 철산(谷那鐵山) 으로부터 나옵니다. 멀어서 7일을 가도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학자들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칠지도가 만들어졌음을 주장했다. 고(故) 이병도 박사는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으므로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며,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연구를 토대로 뒷면의 ‘백제왕세자기생성음(百濟王世子奇生聖音)’을 백제의 왕세자인 기생(奇生)으로 읽었다. 기생(奇生)은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 귀수(貴須)와 일치하므로 ‘백제왕세자’는 근구수왕을 가리키고, 태화는 근구수왕의 아버지 즉 근초고왕 재위 24(369)년부터 사용한 연호라고 해석한 것이다.

고려대 홍성화 씨는 한 학술대회에서 조금 다른 의견을 발표 주목을 받았다. 즉 NHK X-레이 판독 결과 ‘11월 16일 병오’가 확실하므로 이에 합당한 ‘일간지(日干支)’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4~6세기 사이 11월 16일이 병오(丙午)인 날 가운데 408년이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했다. 즉 백제 전지왕 4년 광개토대왕 비문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396년) 백제가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 與倭和通)’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 전지왕 5(409)년 왜의 사신이 와서 크게 우대했다’는 기사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해에 ‘왜국의 사신이 야명주를 보냈고 왕은 너그러운 예로 이를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다(倭國遣使送夜明珠王優禮待之). 이 시기(396~409년 사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에 어려움을 겪자 왜를 끌어들여 대응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칠지도
칠지도

‘곡나철산’ 도대체 어디인가

그러면 칠지도가 만들어진 문제의 ‘곡나철산’은 지금의 어디인가. ‘7일을 소요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먼 곳.’ 바로 이점이 주요쟁점이 되어 왔다.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 전라남도 곡성(谷城), 황해도 곡산(谷山), 최근에는 서산시 지곡을 곡나로 주장하는 견해까지 합세했다. 서산시에서는 지역 학자들이 학술 행사를 열고 사철광이 많은 지곡리 일대를 곡나의 고지로 해석했다. 그리고 칠지도를 만든 ‘곡나’라는 비석까지 세워 학계에서는 너무 앞서간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곡나로 비정되는 한반도 여러 지역은 일본서기 기록과 부합되는 곳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곡나 철산에 관해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지명에 대한 연구들이 이미 진행되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만큼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먼저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후 한국 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위치 비정을 시도하였다. 학계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정황을 감안, 그동안 황해도 곡산을 가장 유력한 곳이라고 생각해 왔다. ‘서쪽에 강이 있고 걸어서 7일을 가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수 년 전 NHK에서 고대 선박을 재현하여 거꾸로 오사카부터 항해를 시작, 7일 만에 충주 남한강까지 오는 해로 선상 답사를 했다. 그리고 주덕 등지에서 수집한 선철을 성분 분석한 결과 칠지도와 근사치를 이룬다는 결과를 얻기도 했다. 일본 사학계는 곡나로 비정되는 여러 곳 중에서 충주를 가장 유력한 곳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충주시 칠금동에서 대단위 백제 철기 유적이 발견됐다. 칠금동(漆琴洞)은 탄금대에 붙어있는 곳으로 남한강 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주목되는 백제 철기유적이 나온 것이다.

<강희자전>을 보면 칠금동의 ‘칠(漆)’자는 ‘칠(七)’과 동의어로 쓰였다. 중국의 좌상(佐相, 한어 대사전) 묵자(墨子)의 귀의(贵义)라는 글에도 ‘漆’을 숫자인 ‘七’로 썼다(墨子曰: “昔者周公旦朝读书百篇,夕见漆(七)十士,故周公旦佐相天子,其修至于今). 또 금(琴)은 금(金)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곳 지명의 유래에는 칠지리와 금대리의 이름을 따서 칠금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칠지(漆枝)는 옻나무 가지라는 뜻인데 옛날에 마을 근처에 옻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금대(琴臺)는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충주 탄금대의 준말이다. 칠지도가 정말 칠금동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지명부터가 잘 맞아 떨어진다.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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