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1964년 동경 올림픽은 처음으로 미국과 유럽을 벗어나 아시아에서 열리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백인이 주도하던 올림픽을 아시아인이 주관함으로써 올림픽이 전 세계적인 축제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도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열등국가에서 선진국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누는 일등 국가로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 올림픽에 투영됐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본은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공사에 돌입했다. 7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이지 올림픽 스타디움과 스포츠의 성당이라고 불린 국립체육관을 지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선수촌을 선보였고 공항을 확장하고 모노레일 열차를 새로 깔았다. 동경 시내의 모든 상하수도 시설도 새로 손보았다. 고층 호텔이 하늘을 찔렀고 오래된 건물들은 새로 단장됐다. 동경이 새로 태어났고 일본 국민들의 가슴에도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동경올림픽은 남북단일팀이 최초로 출전할 뻔한 대회이기도 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1957년 소피아 총회에서 북한의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승인했고, 우리나라 올림픽위원회(KOC)와 협의해 동경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동경올림픽이 열리기 한 해 전인 1963년 10월 스위스 로잔에서 IOC의 중재로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한 대화가 열렸다.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대표가 마주 앉은 것이다. 두 차례 회의가 열렸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 서로 등을 돌리고 말았다.

IOC는 1963년 8월 남북한이 별개의 팀으로 각각 동경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북한이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낼 첫 번째 기회였다. 그러나 북한은 196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신생국경기대회(GANEFO,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에 참가한 탓에 동경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가네포대회는 중국과 인도네시아가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 스포츠 대회다.

우리나라는 동경올림픽에 사상 최대 규모로 10개 종목 224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복싱 플라이급 장창선은 결승에서 일본 요시다에게 불의의 기습공격으로 금메달을 놓쳤고, 밴텀급의 정신조는 손가락 부상에서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일본의 나카오에져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한국은 은 2, 동 1, 종합 순위 25로 대회를 마쳤다.

동경올림픽은 우리 민족의 분단 현실을 보여준 가슴 아픈 대회였다. 한국전 당시 1.4 후퇴 때 헤어진 북한의 육상선수 신금단과 남한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 신문주가 14년 만에 동경에서 만났다. 하지만 상봉한 지 10분도 안 돼 북한이 선수단을 철수시킴으로써 부녀는 또 다시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일본 국민에게는 더없는 영광을 안겼으나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시간이었던 동경 올림픽이었다.

56년 만에 다시 동경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그런데 걱정이 많다. 방사능 오염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욱일기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이 평화는커녕 안전도 담보하지 못하는 형편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올림픽에서 성적도 중요하지만 국민 안전이 우선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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