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인 지하철. 그 노선을 따라가 보면 곳곳에 역사가 숨어있다.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있고, 한양의 시장 모습은 종로를 거닐며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지하철역은 역사의 교차로가 되고, 깊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와 관련, 켜켜이 쌓여있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하철 노선별로 떠나볼 수 있도록 역사 여행지를 내·외국인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 ⓒ천지일보 2019.10.28
사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 ⓒ천지일보 2019.10.28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자연이 몸을 감싼다. 청와대 위쪽에 자리한 부암동. 한적하면서도 아기자기함이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옛 감성이 물씬 풍기기도 한다. 산이 좋고 자연이 좋은 이들에게 턱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부암동 유래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부암동은 북악산과 연계한 산책 코스가 있고, 걷기 좋은 명소로 돼 있다. 편한 차림의 방문객, 혹은 등산복 차림의 방문객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부암동(付岩洞)이라는 이름은 2m 높이의 부침바위가 있어서 유래된 명칭이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꿈속의 무릉도원이라고 하여 무계동이라 칭했다. 또 산 속에 무계정사라는 이름의 정자를 지어 심신수련을 하기도 했다. 부암동은 인왕산과 북한산 자락에 있어 녹지가 많다. 덕분에 이곳을 거닐고 있으면 소규모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들이 곳곳에 있다. 자연과 함께하는 한적한 나들이를 원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장소다.

◆닭 모양 그려진 ‘창의문’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자하문)이 있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워졌다.

특이한 점은 창의문 천장에는 닭 모양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창의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내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한 것이다. 이를 통해 도성을 지키게 한 일종의 풍수 비보책이었다. 마치 관악산 화기를 누리기 위해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들어 놓은 것과 비슷한 뜻이다.

창의문은 풍수적인 이유로 건립된 지 18년 만에 폐쇄됐다. 풍수학자 최양선은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고 이를 조정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두 문을 닿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토록 한 것이다.

흥선대원군 별서인 석파정 ⓒ천지일보DB
흥선대원군 별서인 석파정 ⓒ천지일보DB

◆창의문 밖 ‘세검정’과 ‘석파정’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세검정(洗劍亭)’도 있었다. 세검정은 서울 창의문 밖에 있던 정자로,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정확히 정자를 언제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세검정은 칼을 씻고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다. 이는 인조반정 때 이귀·김유 등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고 칼날을 세웠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현재 건물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 를 바탕으로 1977년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 별서인 ‘석파정(石坡亭)’도 부암동에 있다. 인왕산 북동쪽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한 석파정은 영화 속에 나올 정도의 비경을 갖고 있다. 원래 본래 조선 철종과 고종 때의 중신(重臣)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조영해 별장으로 사용한 근대 유적이다. 이곳을 흥선대원군이 계략을 펼쳐서 인수했다.

조선 후기 학자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서의 매매를 종용했으나 거절당한다. 이에 아들 고종을 이곳에 행차해 묵게 했고,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수 없다하여 김흥근이 이곳을 포기한다. 이후 석파정은 운현궁 소유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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