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석고단(石鼓壇)의 정문 역할을 하던 광선문(光宣門)이 1923년 조선총독부 도서관(朝鮮總督府圖書館)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1927년 6월 현재 남산초등학교(南山初等學校) 뒤에 위치하였던 동본원사(東本願寺) 경성별원(京城別院)의 정문으로 사용된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 정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마침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다.

구체적으로 미군정(美軍政)은 일본인의 재산과 관련해 1945년 9월 25일 <법령 2호> ‘패전국 소속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과 같은 해 12월 <법령 33호>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을 제정 공포했다.

이와 관련해 미군정청(美軍政廳)은 <법령 2호>를 통해서 일본적산(日本敵産)의 이전 및 기타 처분을 금지하는 한편 <법령 33호>의 공포를 통해 일제의 모든 적산을 군정청에 귀속시키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법적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동본원사는 자동적으로 적산사찰(敵産寺刹)로 분류가 됐으며, 본래 황실문화재(皇室文化財)의 위상(位相)을 가지고 있었던 광선문이 하루아침에 적산건축물(敵産建築物)로 격하되는 불행을 겪게 됐다.

한편 해방 이후 동본원사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기를 모르며,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도 명확히 모르나, 당시 정문으로 사용됐던 광선문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47년 국민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광선문(제공: 국민대학교 박물관) ⓒ천지일보 2019.10.28
1947년 국민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광선문(제공: 국민대학교 박물관) ⓒ천지일보 2019.10.28

또한 1947년 10월부터 1948년 1월까지 동본원사가 국민대학교(國民大學校/ 국민대)의 교사(校舍)로 사용됐는데 국민대는 1946년 9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가 상해임정출신 독립운동가들과 뜻을 모아 설립했으며, 신익희는 초대 재단 이사장과 학장을 역임하였다.

처음에는 보인상고(輔仁商高)의 교사를 사용했으나 시설이 비좁은 관계로 다른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당시 재단 이사장이었던 최범술(崔凡述)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동본원사를 학교 교사로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 1948년 1월 1일자에 당시 국민대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광선문의 사진이 게재된 사실을 확인했는데 이는 해방 이후에도 광선문은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2월 국민대가 창성동(昌成洞)에 위치한 구(舊)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에 교사를 마련해 학교를 이전한 이후 광선문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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