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무기질 풍부해 신진대사에 도움

2600여년 전 멕시코서 카카오 최초 식용

15세기 콜럼버스 통해 유럽에 카카오 유입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초콜릿 알려져

밸런타인데이 19세기 영국서 처음 시작

뉴질랜드 더니든 초콜릿 동장으로 유명

 

초콜릿은 무기질이 풍부해 인체 내에서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며 맛이 진하고 달콤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초콜릿은 무기질이 풍부해 인체 내에서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며 맛이 진하고 달콤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무기질이 풍부해 인체 내에서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며 맛이 진하고 달콤한 음식이 있다. 초콜릿이 대표적이다.

인간이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먹기 시작한 시기를 살펴보자. 카카오는 2600여년 전 마야 문명시대에 멕시코에서 인류가 최초로 식품으로 사용했다. 당시 멕시코에는 농경지가 부족하여 농사를 짓기가 쉽지 않았다. 아울러 석회질이 많은 토양과 과도한 토양침식으로 인해 가용성 염기가 부족했던 이유도 농사를 짓기 어려운 이유였다. 또 사냥조차 하기가 힘들었기에 식량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카카오 열매 등 몇 가지 과일밖에 없었다.

기원전 1500년경 멕시코에는 올메크족(olmecs)이 살았다. 그들 역시 농사를 짓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종종 카카오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는 일이었다. 무더운 날에는 가끔 그 열매를 갈거나 빻은 후 물에 섞어 음료로도 마셔 보았다.

카카오 열매의 맛에 매료된 올메크족은 얼마 후 음식에도 넣어보았다. 음식의 맛이 훨씬 좋아짐을 알게 된 그들은 요리를 할 때마다 첨가제로 이용했다. 이러한 카카오 열매를 그들은 신의 선물이라 여겼다.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한 첨가제뿐만 아니라 피로를 풀기 위한 음료 또는 약용으로도 쓰였다.
 

카카오나무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카카오나무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카카오가 유럽에 전해지게 된 시기는 15세기 말 콜럼버스에 의해서였다. 그가 유럽으로 돌아갈 때 유카탄반도에서 생산된 카카오 열매를 갖고 갔기 때문이다.

1530년 이전까지만 해도 카카오 열매로 만든 음료는 거의 달콤한 맛이 없었다. 그래서 달콤한 맛을 내기 위한 방안을 강구했는데, 1530년 이후부터 설탕을 카카오 분말에 넣기 시작했다. 이처럼 카카오가 초콜릿으로 진화를 거듭했지만 19세기 초까지 초콜릿은 액체였다. 고체 형태를 갖춘 것은 1828년에 이르러서였다. 이후 1876년에는 스위스의 대니얼 피터가 분유 성분을 첨가한 밀크 초콜릿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초콜릿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서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우리나라에서 초콜릿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서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우리나라에 초콜릿이 전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구한말의 명성황후가 처음으로 초콜릿을 먹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는 규방 외교를 중시했다. 그 일환으로 러시아 공사 부인이 종종 양화장품과 양과자를 명성황후에게 선물했는데, 양과자 중에 초콜릿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콜릿이 있었지만 영양식품으로 취급을 받아 일반인들에게 보편화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서였다.

초콜릿을 주고받는 특별한 날이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는데, 매년 2월 14일로 밸런타인데이라고 한다. 밸런타인데이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

3세기경 로마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2세 때 원정에 징집된 병사들은 사랑하는 여성과 출병 전 결혼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2세는 그들이 출병 전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제인 밸런타인은 이러한 규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어느 날 건장한 병사 한 명이 그에게로 찾아왔다. 그 병사는 한 여성을 사귀고 있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결혼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는 병사의 말을 듣고 며칠 후 결혼 대상자를 만나 결혼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했다.

사실을 확인한 밸런타인은 이들의 결혼을 허락할 것인지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을 했다. 황제가 내린 결정에 반기를 든다면 큰 형벌에 처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출병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인류애를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밀리에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으며 그들의 결혼식에 주례까지 섰다. 이러한 사실은 클라우디우스 2세에 바로 보고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분노하였으며 이 일로 인해 270년 2월 14일 밸런타인은 처형됐다. 밸런타인데이라고 부르는 2월 14일은 그를 기념하는 날이다.

매년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로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매년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로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뉴질랜드는 산업시설이 거의 없는, 특히 제조업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나라다. 산업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를 발전시킬 지하자원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초콜릿 산업은 120여년의 긴 역사와 더불어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초콜릿의 맛, 용도에 따라 다크 초콜릿, 밀크 초콜릿, 화이트 초콜릿, 미니 초콜릿 등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장식용으로는 화이트 초콜릿이 사용되며, 코팅용으로는 미니 초콜릿이 사용된다. 밀크 초콜릿은 우유를 첨가한 초콜릿으로 맛이 달콤하다. 이와 반면에 다크 초콜릿은 쓴맛을 내는데, 우유가 함유돼 있지는 않으나 35% 이상의 카카오가 함유돼 있다. 모양 또한 다양한데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납작한 형태의 판형 초콜릿이지만 구슬 모양, 하트 모양도 일반화돼 가고 있다.
 

뉴질랜드 남섬 오타고 반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뉴질랜드 남섬 오타고 반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19.10.25

뉴질랜드에서 초콜릿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남섬 오타고 반도에 있는 더니든(Dunedin)이다.

1894년에 최초의 초콜릿 공장이 설립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더니든은 인구가 2천명에 불과한 해안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시골 마을에 불과한 더니든에 큰 전환점이 있었다. 1848년에 344명의 이민자가 이곳에 도착했는데 그들 중에는 중국인이 가장 많았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861년에 중부 오타고 지역에서는 금이 가장 많이 매장돼 있다는 소문이 뉴질랜드 전역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금을 채굴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다른 지역에 있던 중국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이주한 관계로 인구가 약 1만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금광 관련 일에 종사했는데 턱없이 일손이 부족했다. 산에 굴을 파는가 하면 굴을 팔 수 없을 때는 회전식으로 산을 깎아 원석을 채취했다. 그들의 부는 주로 금 채굴을 통해서였다. 이 때문에 금광에 투입돼 돈을 벌려는 노력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하루에 20시간씩 일을 하는 등 고된 노동도 감당해야 했다.

이로 인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더니든은 무역, 경제, 상공업이 가장 발달된 도시로 등극했다. 이처럼 금광 개발에 의한 산업이 호황을 누리게 됨에 따라 초콜릿 공장도 설립됐다. 일반적으로 초콜릿은 카카오 분말에 우유 등을 넣어 만든다.

오래된 역사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듯 더니든 초콜릿 공장에는 늘 초콜릿 마니아(mania)들이 모여든다. 초콜릿 생산 과정 및 역사 등을 보며 초콜릿의 대표 국가로 발돋움한 배경을 배운다. 뉴질랜드는 낙농업이 발달하여 다양한 유제품을 생산한다. 이러한 환경이 뉴질랜드 초콜릿을 각별히 사랑받는 초콜릿으로 발전하게 한 핵심 인자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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