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영국은 벌써 4년째 논쟁 중이다. 브랙시트(Brexit).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소모적이고 지루하고 반복적인 이 논란이 지금 이 시간에도 그치질 않고 있다. 영국과 EU. 행정부와 의회, 의회 내 여당과 야당 그리고 여당 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과 불신은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마치 궤도를 이탈한 열차처럼 브렉시트 논란의 종착지는 한 없이 불확실하고 불안해 보인다.

그러는 사이 영국정치는 한없이 작아져버렸다. 행정부는 무기력증에 빠져있고 의회는 갑론을박으로 연일 대치정국이다. 오죽했으면 영국 국민들까지 길거리로 나서봤지만 그마저도 양쪽으로 갈라섰다. 이쪽에서 ‘브렉시트 찬성(Brexit now)’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길거리로 나서면 저쪽에서는 ‘브렉시트 반대(stay in)’가 적힌 손 팻말로 응수하는 모습이다. 물론 그 마저도 이제는 모두 지쳐버린 상태다. 폭력사태로 치닫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다.

냉철한 현실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브렉시트 문제를 공론화시킨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가 총선 공약대로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브렉시트 찬성표가 더 많았다.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이후 메이(Theresa May) 총리 시대를 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더 꼬이게 만드는 메이 총리의 ‘특이한 재주’는 브렉시트 해법을 더 깊은 늪으로 빠뜨리기 일쑤였다. 좌충우돌 해법을 내놓곤 하다가 결국 총리 임기 3년 만에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다. 그 이후 지난 7월 24일 존슨(Boris Johnson) 총리 시대를 열었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는 모습이다. 이제는 정말로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브렉시트 강경론자인 존슨 총리는 당초부터 야당과의 타협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딜 브렉시트’를 언급하는가 하면 브렉시트 시한(10월 31일)을 더는 연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거듭 강조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없고 갈 길은 멀다 보니 존슨도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단기처방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그 마저도 버커우(John Bercow) 하원의장에 의해 거부되기 일쑤다. 이 쯤 되면 버커우 의장이 야당 출신이 아닌가 싶겠지만 그는 보수당 출신이다. 당을 떠나 행정부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의회를 대표하는 버커우 의장의 언행이 더 돋보인다는 평가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존슨 총리는 지난 10월 17일 EU와 극적으로 브렉시트 합의안을 도출해 냈다. 사실상 브렉시트 정국의 분수령이 될 합의였다. 이 합의안을 처리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토요일인 19일 하원 전체회의가 소집됐다. 그러나 ‘노딜 브렉시트’를 막기 위해 이행 법안부터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레트윈(Oliver Letwin) 의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레트윈안’이 통과된 것이다. 여기에는 이행 법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브렉시트 시한을 다시 3개월 연장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결국 존슨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은 상정도 못한 채 이행 법안 마련 이후로 또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이날 회의를 주도한 이가 바로 버커우 의장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당초 합의대로, 그리고 존슨 총리의 공언대로 10월 31일까지는 브렉시트가 단행되든 아니면 존슨의 합의안을 통과시키든 결론을 봐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트윈 안’이 통과되는 바람에 서둘러 이행 법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내년 1월 31일까지 시한이 다시 3개월 연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황한 존슨은 ‘대안’으로 이행 법안을 3일내에 마련하자는 ‘신속처리계획안(programme motion)’을 의회에 상정시켰다. 다급한 존슨의 설익은 대안이었지만 반대파 의원들에겐 말 그대로 ‘꼼수’에 다름 아니었다. 브렉시트 이행을 위한 법률안을 어떻게 사흘 만에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영국 의회는 지난 22일 ‘신속처리계획안’을 표결 끝에 부결시켰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국가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이행 법안을 졸속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존슨 총리의 구상은 또 좌절되고 말았다.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브렉시트 시한, 레트윈 안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EU에 다시 브렉시트 시한 3개월 연장을 요청하긴 했지만 존슨 총리의 리더십은 거의 바닥이 드러난 셈이다. 아무튼 이젠 EU의 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난감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EU가 존슨의 요청을 거부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EU의 고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관건은 EU가 시한 연장에 동의하더라도 영국이 어떻게 해법을 찾느냐는 것이 핵심이다. 신뢰를 잃어버린 존슨 내각, 주도권을 놓쳐버린 여당, 대안도 내놓지 못하면서 반대에만 익숙한 노동당 그리고 너무도 지쳐버린 국민들. 이대로는 뭘 해도 안 될 것이라는 비관론과 회의론이 영국 전체를 삼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보인다. 그렇다면 브렉시트 정국의 판을 새로 짜기 위해 ‘조기 총선’을 택하는 방안도 유효할 것이다. 물론 노동당이 반대하면 이마저도 어렵겠지만 마냥 시한을 연장하는 것이 해법이 아니라면 노동당도 반대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국민의 지지를 받는 차기 정부에게 브렉시트 문제를 넘기는 것이 옳다는 여론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존슨 총리의 정치력은 회복 불능에 가깝다. 조기 총선으로 재신임을 받지 않는다면 ‘존슨의 비극’은 더 큰 영국의 비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노동당은 그의 공범이 될 것인가. 바닥까지 간 존슨 총리의 다음 승부수를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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