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북주의 효민제는 강하고 과감한 성품을 지녔으며, 나름대로 계략에 자신에 자신했다. 당시에는 그의 당형 우문호(宇文護)가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식(李植)과 손항(孫恒)은 우문호가 두려워 하찮은 무리들과 어울리면서 우문호를 비방했다. 쌍방은 각자 어부지리를 얻기 위핸 계략을 가동시켜 대단한 활극을 펼쳤다. 이식과 손항이 효민제에게 말했다.

“우문호의 권세가 강화되니 모신과 숙장들이 그에게 붙고 있습니다. 대소사가 모두 그들의 손을 거치고 있습니다. 우문호는 신하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니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효민제는 이미 우문호를 견제하고 있었다. 효민제가 인정하자, 두 사람의 무리들이 다시 부추겼다.

“선왕께서는 이식과 손항에게 조정사를 맡기셨습니다. 우문태는 자신을 주공(周公)과 비유합니다. 주공은 무려 7년 동안이나 섭정 노릇을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총명과 지혜를 겸비하셨는데, 7년 동안이나 신하에게 정치를 맡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효민제는 무예수련을 구실로 무사들을 후원으로 불러 체포술을 연습하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소인배는 결심한 후에도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가장 큰 두려움은 모험성이 높을수록 실패의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큰 인물은 정당성을 확신한다면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효민제의 지지를 얻어냈지만, 상대가 워낙 막강한 실력자였기 때문에 이식과 손항은 아무래도 일이 쉽게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안감이 커지자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려고 어중이떠중이까지 모으자 비밀을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그들은 장광락(張光洛)을 모의에 끌어들였다. 불신한 장광락은 그 사실을 우문호에게 실토했다. 우문호는 선수를 써서 이식과 손항을 축출했다. 효민제는 두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자, 우문호가 반대했다.

“가깝기로는 형제보다 더한 사람이 없습니다. 형제를 믿지 못하면서 누구를 믿겠습니까? 선제께서는 신에게 폐하의 보좌역을 맡겨 가문과 나라를 지켜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은 전력을 다해왔습니다. 폐하의 위엄이 사해에 떨친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의 염려는 간신들의 득세로 사직을 망하는 것뿐입니다.”

통이 작은 인간은 한 번 의심한 상대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효민제는 여전히 우문호를 의심했지만, 이식과 손항을 재기용하지 못했다. 이식과 손항도 우문호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그들의 계획은 뻔했다. 효민제의 명의로 잔치에 초대했다가 암살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광락이 계획을 누설한 것을 몰랐다. 우문호가 선수를 쳐서 그들을 체포했다. 대세가 기울자 효민제는 내전에 숨었지만, 우문호가 그를 별궁에 가두고 우문태의 아들 영도공(寧都公) 우문육(宇文毓)을 옹립했다. 그가 명제(明帝)이다. 이식과 손항은 피살되었으며, 약양공(略陽公)으로 폐출된 효민제도 1개월 후에 살해됐다.

우문호는 노련했다. 그러나 자기보다 고수를 당하지는 못했다. 그가 옹립한 명제는 제법 민첩해 AD560년 우문호에게 피살되기 직전에 재빨리 동생 우문옹(宇文邕)에게 전위했다. 그가 20년 동안 북주를 다스린 무제이다. 무제가 즉위했을 무렵 북제는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북주의 무제는 권신 우문호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의 전제를 잘 참았다. 우문호는 신흥민족 돌궐과 연합해 북제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AD572년, 북주의 무제는 드디어 우문호를 죽이고 친정을 시작했다. 이 때 북제에서는 명장 곡율광(斛律光)이 피살되면서 급격히 세력이 약화됐다. AD 576년, 북주의 무제는 마침내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했다. 이제 중국은 남북의 대결이 재개됐다. 승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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