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경기가 끝난 지 수일이 지났지만 긴 아쉬움의 여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중계방송을 했던 방송사의 홈페이지에서 TV 다시보기를 통해 결정적인 장면을 보고 또 봤다. 볼수록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놀랍고 의외여서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준결승전 한·일전 축구 이야기다.

한국선수들은 승부차기 전까지는 연장 30분 황재원이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리며 기사회생을 할 수 있는 극적인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운은 거기까지였다. 승부차기에서는 철저히 운이 비켜갔다. 첫 번째 키커 구자철과 두 번째 키커 이용래의 슈팅이 연이어 일본 골키퍼 가와시마 에이지 손에 걸렸다. 세 번째 키커 홍정호가 찬 공은 아예 골문을 벗어났다. 승부차기 결과 3-0 패배였다.

왜 한국의 키커 3명은 모두 실축을 했던 것일까. 또 일본 키커들은 어떻게 여유 있게 성공을 시켰을까. 승부차기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집어넣지 못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승부차기의 ‘묘수’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선수건 일본 선수건 모두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슛을 했을 텐테, 결과는 너무 다르게 나왔다. 그 이유로 수학이나 물리문제를 풀듯 객관적으로 딱 떨어지는 것을 찾을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부차기나 페널티킥은 기술보다는 운이 많이 작용하기 경향이 많아 축구선수들에게는 ‘공포의 킥’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변 정황이 선수에게 심한 압박으로 작용하는 묘한 심리학이다. 골을 넣으면 본전이지만, 실패하면 모든 비난을 감수하는 이른바 ‘역적’으로 몰린다. 따라서 유명 선수건 동네 선수건 승부차기나 페널티킥은 생사를 건 일명 11m의 ‘러시안 룰렛게임일 수밖에 없다.

승부차기는 절대적으로 키커에게 유리한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골문에서 11m 떨어진 페널티킥 지점에서 볼을 차면 골라인까지 0.4~0.5초 만에 도달한다. 이를 골키퍼가 감지하고 몸을 움직이는데 걸리는 반응시간은 0.6초 정도여서 제대로만 차면 성공률은 거의 100%라는 얘기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대체적으로 승부차기 성공률은 80% 정도에 그치고 이번 한·일전처럼 아예 0% 일수도 있다.

이번 승부차기를 보면서 예전 한국축구를 울리고 웃겼던 대표적인 페널티킥을 포함한 승부차기가 떠올랐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이던 1969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한국과 호주의 경기에서 ‘비운의 스타’ 임국찬은 1-1이던 후반 20분 상대의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결정적으로 실축했다.

이 한판을 이겨야 호주와 2 승1무1패로 동률을 이뤄 최종전을 치를 수 있었던 한국은 임국찬의 실축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임국찬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모든 비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은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야 했다. 이에 반해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의 승부차기는 전 국민을 열광의 바다로 밀어 넣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연장전까지 0-0으로 동점을 이룬 뒤 승부차기에서 홍명보는 한국의 마지막 키커로 등장, 천금 같은 골을 성공시켜 승부차기 5-3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 해 17세 이하 여자 월드컵 결승에서 한국은 일본과 맞붙어 연장전까지 3-3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5-4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FIFA주관 대회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축구의 승부차기와 관련한 사례는 예시한 것 이외에도 훨씬 더 많이 있다. 다만 상황적으로 극적인 것을 들었을 뿐이다.

이번 한·일전 승부차기 패배를 놓고 20대 초반의 신예들로만 차게 한 조광래 감독의 미스매치를 지적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조광래 감독이라고 이기기 싫어서 승부차기 멤버를 그렇게 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운이 잘 따라주질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스타 로베르토 바조, 세계 최고의 키커 데이비드 베컴도 승부차기, 페널티킥을 실패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번 한ㆍ일전에서 그렇듯 어떠한 상황에서도 확실한 해법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승부차기는 새삼 교훈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승부차기의 묘수는 축구가 있는 한 인간의 허황된 마음을 비웃으며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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