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푹푹 찌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스팔트 도로에는 아지랑이가 일어 춤을 추었다. 달리는 차들이 물속의 그림자처럼 심하게 흔들려 보였다. 불볕에 한참을 서 있던 끝에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탈 수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는 택시 안은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정말 시원하고 좋습니다.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그 많은 택시 가운데서도 막상 어느 택시인가를 만나는 것은 한 가닥 인연이라도 있어야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사 아저씨들이 손님을 가려 태우느라 행선지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빼는 밤늦은 시간에 그런 걸 가끔 느낍니다. 그 시간에는 도로 한복판에까지 취객들이 들어와 택시 쟁탈전을 벌이게 되는데 도저히 그 난장판에서 승자가 될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되면 포기하고 터덜터덜 걷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 날 태워줄 차를 만나게 되고 도저히 못 들어 갈 것 같던 집에 무사히 들어가게 된 경험이 적지 않거든요.”

“인연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인연이에요. 운전하면서 그렇게 느낄 때가 많아요. 손님 한분 모시는 것도 우연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제 인생 모두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부모 얼굴도 모릅니다.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흐르는 대로 흘러왔지요. 그런데 지금 이 나이 먹어 생각하니 그게 다 인연 따라 살아진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보따리는 이내 만수위(滿水位)의 둑을 무너뜨리듯 터질 것 같았다. 얘기가 터지기 전에 물어서 안 그의 이름은 Y씨, 개인택시 기사, 나이는 75세, 고향은 전라북도 남원의 어느 산골이었다.

‘인연’이라는 말 한마디가 처음 보는 사람의 숨겨둔 사연을 듣게 되는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냈다. 얼핏 보아서는 험한 세월을 산 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배움도 있어 보이고 어법(語法)과 매너도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얼굴은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고 혈색이 좋았다. 윤기가 돌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굵은 주름은 물론 잔주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은퇴한 고학력자 아니면 사업에 실패한 자영업자 출신이 아닌가 짐작하게 해주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부모 얼굴도 모른다고 했으니 무슨 곡절과 사연이 있는 것인가. 그의 인생 스토리(Story)는 아주 뜻밖이었다. 큰 줄거리는 이렇다. ‘3살 때 아버지 어머니를 다 잃었다. 나무꾼 아버지는 산에서 나뭇짐에 깔려 돌아가셨다. 그러자 살 길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얼마 안 있어 그 젖먹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함께 맡겨진 성경책 한 권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7살이 되던 해 보릿고개에 그 집을 나왔다. 서울이 어느 쪽에 붙어있는지도 잘 몰랐지만 하여튼 서울이 목표였다. 그 집에서 나가래서가 아니었다. 우연히 내가 그 집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철이 없었을 때이지만 내가 가난한 그 집에 더구나 보릿고개에 미운 오리새끼가 되는 것이 싫었다.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있을 리가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내달렸는데 어디쯤에선가 해가 서산에 몸을 감추기 시작하자 무서웠다. 배도 고팠다. 남의 집에서 밥 얻어먹고 처마 밑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거지처럼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서울까지 오는데 3년이 걸렸다. 서울역에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구두닦이가 됐다. 10년을 그렇게 보내다가 구두 닦으러 오는 단골손님의 수색 벽돌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서울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잠 재워주고 밥만 먹여주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몇 년인가를 지냈는데 그 사장님이 밤에 글을 가르쳐 주고 운전 학원에 나가게 해주었었다. 그렇게 해서 26살에 화물차 조수가 되고 한참 지나 운전수가 됐다. 그러다가 30살 때 누구의 소개로 성북동 부잣집 사모님 모시는 기사가 됐다. 온 정성을 다 해 모셨다. 운전수 겸 온갖 심부름 마다 않는 몸종이고 비서였다. 35살 때 그 사모님이 장가가고 싶지 않으냐고 했다.

내 조건과 처지를 생각해 사양했지만 그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친척 처녀와 인연을 맺게 해주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좋고 배움도 있고 집도 괜찮게 사는 경상도 아가씨였다. 찰떡궁합이었다. 매일 붕붕 떠 살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사모님은 화물차 하나와 피혁 원단 1억 원어치를 사주며 전국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게 해주었다. 아내와 함께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면서 돈을 엄청 벌었다.

지금 다 번듯한 직장과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 효자 효녀인 2남 1녀가 생겼다. 그렇게 번 돈으로 포천에 피혁 공장을 세우고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런데 IMF 구제 금융을 받던 경제위기 때 부도가 났다. 빚은 1원도 남기지 않고 다 갚았다. 남은 것은 평수 적은 아파트 한 채, 그 집에서 만족하게 살고 있다. 자식들은 말리지만 이렇게 택시를 몰면 아내와 나 두 식구 행복을 유지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성경 한 권만 달랑 남겨주고 떠난 어머님이 애타게 보고 싶을 뿐이다. 그것도 인연에 맡기겠다. 나는 성공한 인생 아닌가. 일말의 후회도 없다.’ 이렇게 말을 마칠 즈음 택시에서 내릴 때가 됐다. 연락처를 주고 내렸는데 아직 간절하게 기다리는 소식이 없어 답답하다.

‘어린 것’이 풍찬 노숙(風餐 露宿)으로 3년을 버티고 살아남아 서울에 온 얘기는 몹시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 과정도 그렇지만 그의 인생은 고비 고비마다 힘이 돼주는 인연이 생기고 그것에 따라 엮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니 그는 타고난 착한 심성과 정직함, 성실로 자신의 운명과 좋은 인연을 개척했다.

길이 안 난 길을 내고 걸으며 살아 온 사람이다. 남을 위해 살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구제할 수 있었다. 남이 그를 돕고 세상과 하늘이 그를 돕게 만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핸들을 잡은 그 노(老) 기사가 인생의 큰 스승처럼 보였다. 부끄럽지만 그에게 나를 비추어 보았다. 그는 앞으로 더욱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를 소재로 작품이나 하나 써 볼까나.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