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복국 저항 마지막 왕도 주류성 청양 ‘칠갑산’ 두솔성(1)
[다시 쓰는 백제사] 백제 복국 저항 마지막 왕도 주류성 청양 ‘칠갑산’ 두솔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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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칠갑산
칠갑산

백제 왕도 소부리 최후의 날

660년 7월 12일(음력).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제국 왕도 소부리는 20만에 가까운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당나라 13만 대군은 해로로 서해를 건너 기벌포를 통해 진군해 왔고, 신라 정병 5만 명은 황산벌을 거쳐 동쪽에서 백제 나성(羅城) 가까이 접근해 왔다.

도성 안의 2만 명에 가까운 백제인들은 결사 항전을 선언한다. 수많은 군기를 펄럭이며 진을 친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멀리서 소부리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김유신 장군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결사 부대인 낭당(郎幢)을 선두로 먼저 성벽을 공격했다. 신라군이 도성을 향해 쏜 불화살이 이곳저곳 건물을 태우기 시작했다. 건물들에 불이 붙자 도성 안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가득했다. 왕도 동편의 낮은 나성(羅城)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신라 기병과 당나라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나당연합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백제군을 도륙했다.

불은 왕성 안 대찰 정림사를 태우고 궁궐로 옮겨졌다. 궁 안에서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의자왕은 피난해야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밖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항전하는 왕자 태를 제외하고 태자 효(孝)를 데리고 궁성을 빠져나왔다. 의자왕은 기병들을 재촉하여 지금의 공주 땅인 웅진(熊津) 고마성으로 피신한다. 궁 안에 있던 많은 비빈, 궁녀들은 나당연합군을 피해 부소산에 올라갔다. 피할 곳은 단 하나 천 길 낭떠러지 백마강. 나당연합군의 함성이 커지자 이들은 결심한다. “아! 백제여~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로구나.”

궁녀들은 통곡하며 백마강 아래로 꽃잎처럼 떨어진다. 그 수가 속설에는 3000명이라고 했다. 더 많은 숫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살아남을 경우 노비가 되어 짐승처럼 능욕을 당할 것을 알기에 죽음을 택한 것이다. 도성은 화염과 나당 연합군의 고함소리, 백제 병사들의 죽어가는 신음 소리가 진동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백제 수도 소부리 부여 최후의 날을 상정하여 그린 소설적 상황이다. 지금도 왕궁유적인 부여 관북리를 발굴하면 당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도시의 잔해가 수없이 발견된다. 금방 구운 듯한 회청색의 토기 조각들과 불에 탄 기둥의 잔해들이 드러난다. 백제 최후의 날이 이처럼 처절했다니….

칠갑산 돌로 쌓은 벽
칠갑산 돌로 쌓은 벽

백제 유민의 저항 운동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에 따르면 공산성(공주)마저 힘없이 무너지고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그리고 대신과 장군 88명, 백성 1만 2800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여러 지방의 백제성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성주들은 백제 멸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왕족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을 중심으로 이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백제의 주력군이었던 서북쪽의 여러 성과 남쪽의 여러 성이 호응했다. 이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크게 확대되었다. 복신은 먼저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사비성을 공격하여 이를 회복했다. 당시 사비성에는 얼마 안 되는 당군이 진주하여 쉽게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 복국군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복신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불러 다시 왕위를 잇게 하고 험준한 주류성을 임시 왕도로 삼아 나당연합군에게 항전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나당연합군에 잃었던 모든 백제성을 회복했다. 신라는 여러 곳에서 백제 복국군과 싸웠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장창병(長槍兵)과 김유신의 군사들 외에는 승리하지 못했다. 백제 정복의 오랜 염원이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당 황제에게 보낸 글을 보면 당시 복국군의 기세를 짐작할 수 있다.

“(전략)복신의 도당은 점차 불어나 강 동쪽의 땅을 침범해 차지하는데, 웅진의 당병 1000명이 적도들을 치고자 나갔으나 적에게 패해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패배를 겪고 나서는 웅진에서 병사를 요청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지는데, 신라가 많은 질병을 안아 병마를 징발할 수 없었음에도 괴롭게 청하는 것을 뿌리치기도 어려워, 마침내 병사를 내었고 가서 주류성을 포위하게 하였습니다. 복신은 병사가 적은 것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곧장 와서 치니 병마를 크게 잃고 이로움을 잊은 채 돌아왔으며, 남방의 여러 성은 일시에 반역해서 모두 복신에게로 속했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포위하여, 웅진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소금과 장이 끊어지자, 즉시 건아를 징발해 그 곤궁함을 구제했습니다(하략).”

사기가 진작된 백제 복국군들은 일본과 연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백제 복국군은 이후 3년 동안 신라와 처절한 항쟁을 벌인다. 그런데 백제는 당나라의 증원군으로 복국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보내 백제 복국군을 공격했다. 일본과의 연합에 대한 우려가 컸으며 백제 기세를 꺾지 못한다면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 점령 플랜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풍왕은 일본과 연합전선을 펴며 응원부대를 요청한다. 일본 왕은 전함 수백 척과 전사 수만 명을 파견하도록 했다. (<일본서기> 천지왕조 2년 기록에는 전선 170척과 군사 2만 7000명으로 기록됨)

당시 풍왕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항전 의지를 키웠다. 이 성은 험준하여 신라군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 천혜의 요새였다. 일본 해군의 선단이 도착하는 백강의 어귀에서 나당연합군과 일대 접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선이 포구에 닿기도 전에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라군의 포노(砲弩, 불화살)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들은 상륙도 하기 전에 패퇴하고 말았다.

나당 연합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그다음 공격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를 먼저 칠 것이냐. 부여 가림성, 예산 임존성을 치자는 견해가 있었고 정산 두량윤성부터 치자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백제 우두머리가 있는 주류성을 치자고 결의한다. 그런데 이들은 진군하면서 같은 날 정산 두량윤성을 먼저 정복했다. 이날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여 쉽게 풍왕을 패퇴시켰다. 풍왕은 백강에서 백제 왜의 연합군이 궤멸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군이 포위해 오자 근신들과 함께 성을 포기, 탈출한 것이다. 3년 백제 복국 의지를 불태웠던 주류성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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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 2019-10-23 22:37:20
피로 세워진 나라가 한국인데 아직도 암투는 끊이지 않고 있으니 선조들이 그만 싸우라고 하시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