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90년 전인 1929년 10월 지금의 서울 계동 현대그룹 빌딩 자리에 있던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첫 경평축구대회(京平蹴球大會)가 열렸다. 서울인 경성과 평양은 조선의 남과 북을 대표하는 도시였는데 이 두 도시가 서로 축구 경기를 펼쳤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다.

경평축구대회는 스포츠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일보가 마련했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무슨 민족정신이냐고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1회 대회에선 모두 3차례 경기를 펼쳐 평양이 2대 1로 승리했다.

그 다음해인 1930년 1월 후에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뀐 경성운동장에서 2회 대회를 열었는데, 경성 팀이 3전 전승했다. 이후 조선일보 사정으로 2년 간 열리지 못했으나 1933년 4월과 10월 평양공설운동장에서 3, 4회 대회가 개최됐고, 다음해 4월 경성에서 5회 대회가 열렸다. 5회 대회에서는 그러나 경기가 과열돼 판정시비가 일고 지역감정으로까지 번져 이후 다시는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남북이 갈리고 국제대회에서 남북대결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선수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고, 국민들도 손에 땀을 쥐고 응원했다. 기껏해야 아시아 지역에서 고만고만한 팀들끼리 맞붙는 대회였지만 남과 북이 만나면 피가 튀겼다. 일본과 싸워 이기는 것도 중요했지만 북한과의 대결에서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시절이었다. 이기면 각하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고, 지붕 없는 지프차를 타고 종이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시내를 행진했다. 축구에 진 북한 선수들은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웃기지만 슬픈 시절이었다.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도 그랬지만 바다 건너 남의 나라들도 그랬다. 1990년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 되면서 냉전시대라는 것이 막을 내렸다. 얼어붙었던 지구촌이 갑자기 봄 햇살을 맞으며 화사해졌다. 그해 여름 중국 베이징에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는데, 느닷없이 남과 북이 통일축구라는 걸 열기로 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팩스로 원고를 보내거나 전화로 기사를 부르면 원고지에 받아 적던 시절이었다. 선배가 부르는 기사를 똑바로 받아 적지 못하는 후배 기자는 바가지로 욕을 먹어야 했다. 중국 출장을 다녀온 기자는 아주 오랜 동안, 술을 마실 때마다 중국 이야기를 했다.

1990년 10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경평축구대회가 열렸다. 평양 1차 대회 때 이회택 감독은 40년 만에 헤어진 아버지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그해 10월 미국 뉴욕에선 남북영화제가 열렸다. 분위기가 좋았다. 다음해 4월 일본에서는 한반도기를 앞세운 탁구 남북단일팀이 우승 신화를 일궜고, 6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선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북단일팀은 없던 일로 했다. 스포츠라는 게 그런 것이다. 엿장수 마음이다.

우리 선수들이, 관중 없는 경기장에서 전쟁 같은 축구를 하고 왔다. 안 다치고 온 것만도 다행이란다. 전쟁 같은 축구경기가 열리던 날, 최고로 존엄하시다는 그 분은 백마를 타시고 백두산에 오르시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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