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군주가 법의 집행권을 신하에게 양보하면 어떻게 될까? 춘추시대 진완(陳完 BC705~?)은 진(陳)의 공자였다. 내란이 발생하자 제로 도망쳐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다. 손자 전수무(田須無)와 증손자 전무우(田無宇)가 제에서 현달했다. 전무우는 경공의 시대에 포(鮑)씨와 연합해 고(高)씨와 난(欒)씨를 제압하고 공실인 강(姜)씨의 권력강화에 기여했다. 승리한 전씨와 포씨는 고씨와 난씨의 재산을 절반씩 나누었다. 포씨는 자기의 소유로 삼았지만, 전무우는 자기의 몫을 경공에게 바쳤다. 경공은 매우 기뻐했다. 전무우는 경공의 모친 맹희(孟姬)에게도 후한 선물을 보냈다. 맹희는 경공에게 공실의 진흥에 도움을 준 전무우를 포상하라고 요구했다. 전씨는 더욱 부유해졌다. 전무우는 봉록을 받지 못는 공족들에게 자기의 봉록을 나누어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식량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의 아들 전걸(田乞)도 부친처럼 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곡식을 빌려줄 때는 대두로 내주었다가, 받을 때는 소두로 받았다. 도저히 갚지 못하면 아예 장부에서 지워버렸다. 전씨의 야망을 알아차린 안영이 여러 차례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간했지만, 경공은 듣지 않았다. 민심은 점차 전씨에게 기울었다. 경공의 사후에 전걸은 양생을 도공(悼公)으로 옹립하고 재상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다.

전걸이 죽은 후 아들 전상(田常)이 부친의 뒤를 이었다. 도공과 틈이 벌어진 포목이 도공을 시해했다. 도공의 아들이 간공(簡公)으로 즉위했다. 전상과 감지(監止)가 좌, 우상이 되었다. 전상은 어떻게든 감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간공이 그를 매우 아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우선 전상은 부친의 방법대로 ‘대두출(大斗出), 소두입(小斗入)’으로 민심을 얻었다. 기반이 단단해지자 전상은 병력을 동원하여 감지와 간공을 죽이고, 간공의 동생 여오(呂鷔)를 평공으로 옹립했다. 자신은 국상이 되었다. 간공을 죽인 전상은 제후들이 연합하여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점령한 노(魯)와 위(衛)의 땅을 보두 돌려주었다. 또 사신을 보내 진(晋)의 한, 조, 위 등 3가와 오, 월과 우호관계를 체결했다. 대내적으로는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위로했다. 제는 다시 안정되었다. 그는 평공에게 건의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국군께서 베푸시고, 싫어하는 형벌은 제가 집행하겠습니다.”

5년 후, 제의 대권과 민심은 전상에게 돌아갔다. 세력이 강화되자 포씨, 감씨, 안씨, 국씨 등과 공족 가운데 강자를 모두 제거했다. 안평 이동에서 낭야까지 모든 땅을 자기의 봉지로 삼자 평공보다 넓은 땅을 차지했다. 제는 사실상 전씨의 나라가 되었다. 그 후 전상의 아들 전반(田盤), 전반의 아들 전백(田白), 전백의 아들 전화(田和)가 계속 집정하다가 결국 전화가 강공을 대신하여 제의 군주가 됐다.

전씨는 진에서 제로 왔지만 세력이 너무 약했다. 그러나 몇 대에 걸친 경영으로 강족과 병립할 정도의 세력을 키웠다. 이른바 ‘틈을 보아 발을 들이민 이후 주도권을 잡고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적용한 셈이다. ‘전씨대제’의 과정을 보면 두 가지 요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민심수렴을 중시해 민심의 지지를 공실에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둘째는 귀족들 사이의 모순관계를 이용하여 동맹을 맺고 시기를 보아 자기의 적수를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전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몇 대에 걸려 기반을 충분히 다지면서 한 걸음씩 차례대로 나아가며 참외가 익으면 꼭지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처럼 제나라가 손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결국 위문후가 전화를 대신하여 주의 천자에게 진언하게 만들었다. 천자는 정식으로 전화를 제후(齊侯)로 책봉하면서 실제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음에도 찬탈이라는 오명을 덮어쓰지 않았다. 전씨의 심모원려가 빛난 역사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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