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맥국의 도읍지 춘천(2)
[다시 쓰는 백제사] 맥국의 도읍지 춘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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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방동리 고구려 고분
방동리 고구려 고분

온조왕의 춘천 공략과 ‘맥국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개국한 온조왕이 13년(BC 6) 8월에 동쪽으로 ‘주양(走壤)’에 이르렀다고 했다.

“왕은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를 고하고 강역(彊域)을 획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에 한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大海)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八月 遣使 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場,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云云).”

주양은 온조왕 시기 백제 강역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주양은 바로 지금 춘천 땅이다. 온조왕 34년(16)에는 왕이 군사 5000명을 데리고 직접 우곡성(牛谷城)을 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학계에서는 우곡성을 우두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우곡과 우두를 같은 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마한 장군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했다는 것이다. 우근은 본래 한강유역에 있던 세력으로 이들이 온조가 자신들의 영역을 차지하자 맥국에 의탁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

온조왕은 4년 후인 38년에는 주양에 행차하며 평양 대동강까지 순행하는데 5개월이 걸렸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쪽으로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 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는데, 다섯 달이 지나서 돌아왔다(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다섯 달이나 주양과 대동강에 행차한 것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때 온조는 지금의 춘천 우두성에 진주하고 목책을 세우며 낙랑과 말갈의 재 침입을 방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수전
오수전

낙랑 망하고 세워졌다는 맥국설

한강에서 일어난 온조의 걱정은 지리적으로 맞닿은 주변국이었다. 특히 중국 한사군의 세력인 낙랑(樂浪)과 말갈(靺鞨)로 집약된다. 기록을 보면 낙랑은 백제의 동쪽에, 말갈은 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돼 있다.

“온조왕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했다(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낙랑의 세력 근거는 평양이었는데 이 시기 고구려 세력의 발흥으로 주요 집단이 남하한 것인가. 낙랑은 백제와 자주 충돌했으며 이들은 말갈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까지 포위하는 등 기세를 보였다.

낙랑은 37년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 멸망한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는데 백성 5000명이 신라에 투항, 이들을 육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는 것이다(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

일부 학자들은 낙랑이 망한 시기를 춘천 맥국의 탄생으로 상정한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 발굴자료는 춘천 지역에서 중국계 한나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맥국의 고지로 추정되는 율문리-천전리에서 한나라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한 무제 때 처음 주조되어 위진남북조 시기에도 사용되었다)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맥국이 춘천을 중심으로 강원도 전역과 임진강 유역 경기도 일부 까지를 통할하는 넓은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춘천과 고구려 별종 ‘말갈국’설

춘천 맥국집단을 ‘말갈’의 일단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서 말갈은 고구려의 별종(別種) 세력으로 기록된다. 고구려와는 같은 언어로 소통했으며 압록강을 다시 확보한 고구려에 예속하여 살았다.

고구려는 전쟁 때마다 말갈 무장 세력을 앞세워 정복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주몽시대 1만 군사였던 고구려 기병은 광개토대왕, 장수왕대는 5만 병력으로 늘어나 파죽지세로 대륙과 백제, 신라를 제압했다. 그 선두에는 용감한 말갈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속칭 반월성에서는 ‘마홀(馬忽)’이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된 적이 있다. 마홀은 고구려시기 포천의 지명(삼국사기 지리지)으로 매우 주목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마홀’의 다른 한문 표기로서 고구려의 전진 세력인 말갈국의 진주(進駐)로 보고 있다.

그런데 말갈은 백제가 나라를 건국한 이전부터 남하하여 중부지역의 거점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고기는 알려준다. <삼국사기>를 보면 특히 낙랑과의 우호적인 입장에서 백제와 대결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백제 온조왕대는 말갈과의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조왕대만 해도 말갈과의 충돌 기사는 모두 8건이나 된다.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다(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했다(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十八年冬十月. 靺鞨掩 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四十年秋九月. 靺鞨來 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우리 사서에는 말갈의 존재가 7세기 중반 백제말기 의자왕 때까지 나타난다.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성 다수를 공취했다는 기사가 있다.

“의자왕 15년(655) 8월. 왕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다(十五年 八月. 王與高句麗靺鞨侵攻. 破新羅三十餘城).”

삼국의 연합군과 신라의 충돌은 지금의 강원도, 경상북도 북부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한반도 상주한 말갈의 존재는 약 7세기 중반까지 반도의 중심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는 상정이 가능하다.

고구려가 춘천지역을 다시 지배하게 된 것은 4세기 말 이후 광개토왕시기로 추정된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 한강유역을 정벌하기 위하여 남하할 때 포천, 양구, 인제 등 인근지역과 함께 병합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백제가 장수왕의 남하공격으로 하북 위례성을 잃고 웅천(熊川)에 천도하면서 춘천은 더욱 확실히 고구려(말갈)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가 춘천 방동리 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방동리 고분은 남한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북방식 무덤양식이다. 만주 통구(通溝)나 평양 지역에서 조사된 고구려 후기 돌방무덤양식이다. 이 전통이 북방 고구려에 의해 춘천 지역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며 전문가들은 고구려 후기 양식이 지방화한 형태로 보고 있다. 돌방무덤은 춘천시 중도(中島)에서도 2기와 확인되었으며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에서도 1기가 조사된 바 있다. 이 고분은 축천의 맥국 고지와 관련 매우 주목되는 유물이다.

방동리 고구려 고분 표지판
방동리 고구려 고분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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