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공주 대통사지 명문
공주 대통사지 명문

남조의 건축 기술 도입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가 불타고 개로왕이 참수 당하자 문주왕은 남은 신하들을 데리고 비교적 안전한 웅천(熊川)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공산성을 수도로 삼고 다시 국력회복에 힘쓰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백제에는 본격적인 양나라 건축술이 도입됐다. 이런 관계로 한성시대 와당과는 매우 다른 와당문화를 발전시킨다.

웅진 왕도에 있던 대통사(大通寺)는 남조의 건축문화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즉 ‘대통’이란 이름이 양나라 황제 무제(武帝)의 연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대통사는 지금 공주시가지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절터에 남아있던 석조(石槽)의 크기로 보아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대통사는 성왕(聖王) 때 창건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9년조(541)>를 보면 매우 주목되는 기사가 있다. ‘왕은 사신을 양(梁)에 파견하여 조공하고 겸하여 글을 보내 모시박사와 열반등의 경과 아울러 공장(工匠) 화사(畫師) 등을 청하니 양은 이 청을 받아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당시 양나라 황제는 무제(464~549)로 불교에 귀의할 정도로 돈독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냈으며 이 시기 많은 선진 기술을 보낸 것이다. 당시 양나라도 사원을 대대적으로 건축하는 한편 무제가 세 번이나 동태사(同泰寺)의 비구가 되는 등 불교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성왕은 이보다 앞선 시기인 538년 도장(道藏)을 일본에 보내 불경 등을 전수했다. 이것이 일본 불교의 시초가 된다. 당시 승 관륵(觀勒)은 역법(曆法)·천문·지리 등을 일본에 전했다. 혜총(惠聰)·도림(道琳)·담혜(曇慧)·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건축 장인들도 일본에 건너가 건축물 조영을 담당했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마음을 흔들어 왕실에 기반을 굳혔다. 그리고 오사카 나라 등지에 많은 백제 식 가람이 건축되었다.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초기 불교유적을 발굴해 보면 백제 와당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백제왕사라고 붙여진 이름도 있으며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 출토되는 것은 백제계 와당들이다. 이 유물들은 부여 시내사찰 유적에서 흔히 출토되는 와당들이다.

황룡사 터
황룡사 터

대통사지 와당의 특징

남조 영향을 받은 공주천도기 대통사지 출토 와당은 어떤 모양일까. 연꽃은 6엽으로 매우 살찌고 정제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 와당들은 중국 양나라 수도에서 출토되는 기와들과 너무 닮아있다.

수년 전 인사동 상인 하나가 백제 와당을 들고 찾아왔다. 그런데 이를 보니 백제 와당 가운데 남조 와당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너무 똑같이 생겼으므로 일반이 구분하기는 어렵다. 당시 남조 와당은 백제 와당에 비해 값이 싸 일부 골동상들이 속여 판 일까지 있었다.

남조 와당은 6엽, 8엽이 주류를 이루면서 외연(外緣)은 백제 와당처럼 문양을 넣지 않은 소문대(素文帶)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연판은 매우 두텁고 정제되어 있다. 태토도 모래가 많지 않으며 깨끗하고 부드럽다. 그런데 색깔은 약간의 회흑색을 띠고 있으며 와당들이 비교적 작은 편이다. 공주기 대통사의 와당은 이처럼 작은 것도 있으나 부여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와당들은 훨씬 크고 연판도 넓다.

대통사지 와당은 현재 공주박물관에 여러 점이 소장되어 있다. 부여기의 완숙미에 비해 소박하지만 살이 찌고 넉넉하다. 백제 전성기 완벽한 부여 기와당들은 이를 기초로 하여 더욱 세련되어 진 것이다. 백제 와당은 무왕(武王)대 익산 별도(別都) 시기에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미를 갖게 된다.

백제 와당이 많이 나온 금강사지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에 대규모 백제 사찰 유적이 있다. 유명한 금강사지(金剛寺址)다. 금강사의 창건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출토된 유물, 가람배치로 미루어 백제 부여시기 처음 향화가 올려 진 사찰로 보고 있다.

또 <여지승람>이나 <부여구읍지> 등에도 절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터에서 ‘金剛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평기와가 찾아져 ‘금강사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 절터에서 백제 사비기의 가장 많은 와당이 조사되었다. 이 절터에서 나온 서까래 기와는 크기도 크지만 백제 와당의 대표적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서까래 기와는 연판이 두툼하며 대통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의 연판을 닮고 있다. 가운데는 방형의 홈이 파져 있어 못을 박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기와로 미루어 성왕의 부여천도 시기 창사되었지 않나 짐작이 간다. 이같이 크고 아름다운 기와를 얹은 건물을 상상하면 그 답이 나온다. 장엄하고 매우 찬란했을 것이다.

금강사지에서는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와당들이 찾아졌다. 그것은 금강사지가 오랜 시간 존속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신라 기와는 매우 세련된 당나라 와당의 세판(細瓣)을 닮고 있다. 특히 이 절터에서는 당초문 암막새가 다수 조사되기도 했다. 백제시대에는 비교적 암막새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으나 신라 고려시기에 와서는 즐겨 사용한 것이다.

금강사지 건물지는 남북 약 150m, 동서 약 170m로 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 안에 중문, 금당, 강당 등 일탑식 가람을 배치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가람 배치는 동향하여 동서선상에 당전(堂殿)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백제시대의 사지들과는 이례적인 배치를 취하고 있다. 건물 기단은 목탑지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단층 기단이었으며, 금당지는 지대석·면석·갑석을 구비하고 네 귀에는 동자주를 세웠다.

금당 규모는 남북의 길이가 약 19.1m, 동서의 길이가 약 13.9m에 달한다. 금당지의 동쪽에 있는 목탑지 중심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는데,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강당지는 남북의 길이가 약 45.5m, 동서의 길이가 약 19.1m이다.

강당 좌우 측면에는 회랑이 접속되어 있었고, 후면 중앙부에서는 뒤쪽에 위치했던 승방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행랑지가 발견되었다.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5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정암리 가마터
부여 정암리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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