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대한제국 비운의 황실문화재 광선문 변천사(1)
[박관우 칼럼] 대한제국 비운의 황실문화재 광선문 변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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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실문화재(皇室文化財) 위상(位相)을 가지고 있었던 석고단(石鼓壇)의 정문(正門) 광선문(光宣門)이 건립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면서 본 칼럼을 시작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1897년(광무 1) 10월 12일 고종(高宗)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에 황제(皇帝)로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는데 그 곳이 바로 환구단(圜丘壇)이었다.

여기서 환구단이 건립된 지역인 소공동(小公洞)은 조선 초기 태종(太宗)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혼인해 살던 곳으로 둘째 공주가 사는 곳이라 해‘소공주궁(小公主宮)’으로 불리웠다.

그 이후 선조(宣祖)의 아들 의안군(義安君)이 살면서 남별궁(南別宮)으로 불렸고, 임진왜린(壬辰倭亂) 때에는 왜군들이 주둔했으며, 이후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양호(楊鎬) 등 중국 사신들이 머물렀으며, 인조(仁祖) 대에 태평관(太平館)을 철폐한 뒤로는 남별궁을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처소(處所)로 사용했다.

한편 환구단의 규모와 형태와 관련해 독립신문 1897년(광무 1) 10월 12일자 기사를 인용한다.

[ 이전 남별궁 터에 단을 만들었는데 이름은 환구단이라고 하고 황단이라고도 하는데, 역군과 장사 천여 명이 한 달이 못 되어 이 단을 거의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은 삼층으로 맨 아래 층은 장광이 영조척으로 144척 가량인데 둥글게 돌로 석 자 높이를 쌓았고, 이층은 장광이 72척인데 밑충과 같이 돌로 석 자 높이를 쌓았고, 맨 위층은 장광이 36척인데 석 자 높이를 돌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고 맨 아래층 주위로는 둥글게 석축을 만들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해서 세웠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다. ]

그러나 이러한 환구단이 1908년(융희 2) 칙령(勅令) 제50호에 의하여 황실소유(皇室所有)에서 국유화(國有化)가 되면서 불행의 전조가 나타나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국권(國權)을 잃게 된 이후 1911년 2월 20일 환구단의 모든 부지와 건물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철도국(鐵道局)으로 이관(移管)됐다.

그 이후 일제는 1913년 비록 국권은 잃었지만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환구단에 조선총독부 철도국 주관으로 1913년 3월 15일 조선경성철도호텔을 기공해 그 이듬해 1914년 9월 30일 준공했으며, 같은 해 10월 10일 개관했다.

이와 관련해 일제는 철도를 신설하면서 거기에 따른 일본인을 비롯하여 외국인들의 숙소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대한제국의 심장부인 환구단을 파괴함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국민들의 대한제국에 대한 향수(鄕愁)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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