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아차산 보루 위에 쌓아올린 돌탑
아차산 보루 위에 쌓아올린 돌탑

주목해야 할 아차산 유적

아차성은 아차산 위에 구축된 방어용 고대성이다. 유사 시 주변의 성민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보민(保民)성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성벽은 판, 석축이 혼합된 축조방식을 보이며 북방계통인 포곡식(包谷式) 성이다.

북벽은 기저부 폭이 약 8m, 정상부 폭은 6.3m이며, 보축 기저부 폭은 2.3m이다. 가장 잘 남아 있는 외벽 높이는 약 8m, 내벽 높이는 5m가량이다. 내벽과 외벽 모두 거의 수직으로 정연하게 쌓았는데, 외벽의 기저부 바깥쪽은 작은 석재를 이용해 보축했다.

성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지가 확인됐다. 중앙부에서는 대형 덤벙 초석을 이용한 건물지가 조사됐으며, 북서쪽에서는 물을 저장해 두던 연못(蓮池) 하나가 확인됐다. 연지는 암반을 수직으로 판후 바닥에 50㎝ 두께로 뻘흙을 바르고, 벽체는 치석(治石)된 괴석으로 쌓아 올렸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문지는 2개소로 확인됐다. 산성의 가장 남쪽,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가장 낮은 지역은 남문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몇 차례 조사를 통해 많은 양의 기와편과 토기·철기류가 출토됐다. 기와는 대부분이 암키와이며, 문양은 선조문(線條文)이 가장 많고 격자문(格字文)과 승문(繩文)이 타날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양과 기와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이들 기와류는 모두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붉은 계통의 격자문 평기와는 임진강 호로고루 혹은 강원도 양구 비봉산성 등 고대 고구려 성지 유적에서 찾아지는 기와를 그대로 닮고 있다. 기와 가운데는 회백색의 선조가 굵은 백제 기와도 있다. 이는 아차성이 백제시대에 구축돼 고구려, 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이용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밖에 소량의 명문와가 출토됐는데, 대부분 ‘북(北)’ ‘한(漢)’ ‘한산(漢山)’ 등의 명문이 좌서(左書)로 양출돼 있다. 과거 한강 유역에서 채집된 명문와 자료를 참고하면 ‘북한수국해구(北漢受國蟹口)’와 같은 내용이 타날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출토 토기
아차산 출토 토기

아차산과 개로왕의 죽음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아차산성 아래에서 참수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 또한 아차산 장한성이 백제 왕도성임을 뒷받침한다. 개로왕은 백제 20대 비유왕의 맏아들로, 왕이 죽자 뒤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경(慶)으로 불렸다. 백제는 아신왕 때 광개토대왕의 남하로 북변의 여러 성을 잃었으며 60년 가까이 고구려에 눌려 지냈다. 그는 백제 부흥을 위해 군사를 조련하여 469년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다.

개로왕은 북쪽에 있는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우는 등 왕도 방비에 주력했다. 그리고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멸망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고구려가 북위에게 큰 해를 끼치고 있으며 내부 혼란도 있으니 이때가 정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개로왕이 북위에게 사신을 보낸 것은 이후 큰 화를 불러 일으켰다. 개로왕은 장수왕을 짐승에 비유하며 폄하했다. 화가 난 장수왕은 백제 도성을 공격하기 위해 첩자인 승려 도림을 몰래 파견했다. 도림은 장한성에 잠입해 자신이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해 왔다고 속였다. 그리고 개로왕이 바둑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궁궐로 들어갔다. 개로왕은 도림을 만나 좋은 바둑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며 함께 수시로 바둑을 두었다. 어느 날 도림은 개로왕에게 대규모 토목공사를 제의한다.

“대왕이 다스리시는 백제는 사방이 산과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변의 나라들이 쉽게 공격 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대왕이 잘 다스리시는 것에 감탄하여 주변의 나라들은 백제를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마땅히 높은 위세와 부유함을 드러내어 다른 국가의 존경을 받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의 기록을 보자.

“곧 나라사람들을 징발하여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전과 누각 대사를 짓되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큰 돌을 욱리하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어 묻고 강변을 따라 재방을 만들었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하략).”

이러한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제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변방의 방어는 허술하게 됐다. 이 기회를 노린 장수왕은 9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보면 위례성을 점령하는데 7일이 걸린 것으로 나타난다. 성을 포위하고 7일간 전쟁을 한 것은 왕도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위례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진 이중성이었으며, 북성이 무너지자 개로왕이 도주하다 사로잡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만약 개로왕 시기 백제 왕도가 하남 위례성이었다면 3만 대군을 실어 나를 배가 필요해야 했으며 공성(攻城)에도 커다란 문제가 따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무한 것이다. 평양에서 파죽지세로 내려 온 장수왕의 고구려 군대는 왕도 외곽의 몇 군데 북책(北柵)을 허물고 쉽게 장한성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도로서 영욕을 반복했던 하북 위례성, 즉 장한성은 역사 속에 묻혀 잊혀져 가고 있다. 그 중심 지역이었던 장안평 일대는 도시개발로 흔적을 알 수 없이 됐다. 장한성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본 용마산과 아차산은 최근에서야 1500년 전 역사의 비밀을 토해 내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건국대 캠퍼스와 어린이 대공원 등 왕도 유적 안에서 출토 될지도 모를 유물들을 살펴보는 길이다. 하북위례성의 진실을 규명하고 숨 쉬지 못하는 유적을 햇빛 보게 하는 것도 이 시대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전경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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