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람이 슬픈 일이 생겨 통곡 끝에 더욱 처절한 심경이 되면 피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혈루(血淚)라는 것이다. 

청나라 오용당(吳溶堂)이 편찬한 보영이지록(保嬰易知錄)에는 ‘태열(胎熱)과 태화(胎火)에 의한 것이다(乃胎熱胎火所致)’라고 적고 있다. 눈은 간규(肝竅)이며 혈은 심액(心液)인데 화(火)가 심(心)과 간(肝)을 작열시키면 혈을 위로 넘치게 하기 때문에 이런 증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종의 병이라고 했다. 천하의 영웅이라는 항우는 일상에서 매우 냉혹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해하전(垓河戰)에서 대패하고 사랑하는 우미인의 죽음 앞에서 굵은 피눈물을 흘렸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항우는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한다.

신라 진흥왕대 화랑 사다함은 가야와의 전투에서 가장 친한 친구 무관랑을 잃었다. 부상으로 피를 많이 흘린 무관랑을 마차에 싣고 서라벌로 돌아온 사다함은 친구가 끝내 숨을 거두자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살지 못했다.

임을 잃었을 때 피눈물을 흘린 것은 우리 문학에도 나온다. 조선 선조 때 문신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는 아내인 현풍 곽씨가 먼저 죽자 어머니가 손수 지은 수의를 입히며 ‘혈루’ 만사를 짓는다. 

이제 그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니 손수 지으시니 /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 입어도 해지니 아니하리 / 오호라 서럽고 슬프다 / 이제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 나는 남아 어찌 살리오 / 상여소리 한가락 구곡간장 이어져 /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고 말았네

초간은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방장관인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1591년(선조24) 사간(司諫)이 되었다.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학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등 당대 유명한 문신들과 친교가 두터웠다.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불우하게 살았다. 남편은 매일 기방에 드나들어 시인을 외롭게 했다. 허난설헌의 눈물은 남편의 외도로 빚어진 외로움보다는 자녀들의 인단 죽음 때문에 더 컸다. 그녀는 ‘곡자(哭子)’라는 시를 지으며 피눈물을 흘린다. 

(전략) …귀신불은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밝히네/ 종이돈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네/ 맹물을 너희들 무덤에 따르니 (중략) 피눈물이 나와 슬픔으로 목이 메네….

어머니는 자식이 죽으면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고 했다. 자식이 죽음을 당한 더 이상의 슬픔이 있을까. 그래서 허난설헌은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런데 비리를 수사 받고 있는 조국법무장관 부인이 자식들이 검찰에 불려 다닌 것을 보고 피눈물을 흘렸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아들이 어제 아침 10시부터 새벽 2시 넘어 까지 근 16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오늘 새벽 3시쯤 귀가하면서 오늘 처음 느낀 게 제가 참 나쁜 놈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조서를 읽어보면 저는 그런 놈이 되어 있네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아이의 자존감이 여지없이 무너졌나 보다’라며 가슴에 피눈물이 난다고 적었다. 자녀들이 세상을 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한탄과 원망만을 하고 있다.  

지금 검찰이 수사 중인 조국일가의 범죄행태는 과욕에서 빚어진 것이다. 부모가 특권의식을 갖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주선하느라 직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다. 정의와 공평에도 이반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피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측은하게 생각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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