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상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기현상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여당이 검찰을 무차별 공격하고, 심지어 대통령이 검찰을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훈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국무위원 1명의 임명을 두고 야당정치인의 삭발·단식·장외집회, 대학교수 등 전문가집단의 단체서명, 정당대변인 간의 루비콘 강을 건너 버린 독설, 여야 간에 노도와 같이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맞고소·고발, 혼란을 조장하는 극단의 가짜뉴스생산,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공방이 난무하는 기형의 사회에서 헌법상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침해 당하며 살아가는 주권자인 국민은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방기하는 정치권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끝없이 국민이 패싸움을 하도록 원인제공을 하고 또 구경하며 그들의 잇속만 챙기려 드는 정치권을 언제까지 관용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대의민주주의에 실패한 결과 광장민주주의(?)가 당연시 되어가는 현상이 과연 합당한가? 모든 것을 광장민주주의로 해결하려 든다면 기존의 대의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폐기되어야 한단 말인가? 최근 광장민주주의의 터가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옮겨가는 것은 적폐의 대상을 입법·행정에서 사법으로 바꾼 것인가? 현재의 대한민국은 모두가 넋을 놓고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표류하는 배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겁이 난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그를 믿고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국민대통합의 용광로를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주장은 상반되지만 요즈음 또 촛불집회가 대유행이다. 조국아웃 촛불도 있고 조국수호 촛불도 있다. 촛불이 과연 그런 정치적 의미를 상징하는 것일까? 1933년 발표한 신석정의 서정시 ‘촛불’은 부드러운 리듬 속에 명상의 날개를 펴고 전원을 마음껏 만끽하며 사는 목가시인의 만족감을 상징하고 있다. 촛불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거친 정치적 주장을 표출하기 위한 광장의 촛불은 신석정의 작품에 나오는 촛불에 비해 자연적이지도 않고 순정적이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아름다운 황혼을 위해 촛불을 켜지 않는 그 소박하고 부드럽고 포용스런 촛불 특유의 밝음과는 너무도 다른 갈등의 불빛일 뿐이다.

국가위기상황에서 국론통일을 위한 사회통합의 길은 이미 홍수로 두절된 상태이다. 긴급복구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반드시 복구해 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최근 두어 달 간 사회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은 주체가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적시하기가 민망하지만, 매일매일 거론되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 그들이 오늘의 적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호의 표류나 난파를 방치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운명을 걸고 대한민국호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 세워짐은 반드시 정의의 이름이어야 한다.

지난 날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과오나 실수로 인권을 침해하고, 검찰권을 남발하여 국민의 신뢰를 잃은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검찰이 이번 사태의 해결을 위해 총대를 메야 한다. 검찰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자. 정의의 이름으로 반듯하게 해결하고 나서 지난 날 검찰의 잘못을 통회하며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기 바란다. 나무(검찰)가 멀쩡한 날 흔들릴 리가 있었을까?

바람(정치권의 간섭)이 부니 흔들린 것이지 라는 항변도 할 수 있겠으나, 여론의 이름으로 행하는 지난날의 니죄를 니가 알렸다라는 식의 거친(?) 국문(鞫問)에 자복하며 죗값을 치르고 용서를 구하라. 이 번 사건을 확실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용서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검찰이여, 정의를 세워 부디 검찰의 명예를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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