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A와 B, 그리고 나는 인근 호프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절친한 친구의 아내 문병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친구의 아내는 폐암으로 입원하고 있었는데, 수술이 어려울 만큼 이미 암이 퍼진 상태였다. 예상되는 결과가 눈에 선한지라 우리는 모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바로 헤어지지를 못하고 생맥주집을 찾아 들어온 터였다.

“녀석, 아무래도 조만간에 화장실에 가서 웃게 될 것 같은데...”

무거운 분위기를 싫어하는 A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바람에 나와 B도 짐짓 쾌활하게 떠들었다.

“그럼, 아직 젊겠다, 철밥통 같은 직장 있겠다, 아마 처녀장가를 한 번 더 가도 될 거야.”

“맞아. 딴은 부럽기까지 하네.”

이렇게 찧고 까부는데 옆자리에서 굵은 바리톤 목소리가 들렸다.

“뭐, 세상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한 사내가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 기름하면서도 창백한 얼굴을 가진 사내는 우리와는 얼추 또래지 싶었는데, 우리를 향한 눈빛이 여간만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아마 아내의 죽음을 목전에 둔 친구에 대한 우리들의 농담이 귀에 몹시 거슬렸던 모양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사내는 우리 같은 놈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곧 말을 이었다.

“제 친구 중에는 이런 녀석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시작된 사내의 스토리는 우리의 귀를 확 끌어당기고 입을 딱 벌어지게 할 만큼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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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이식수술을 받자고. 처제가 자기 것을 제공하겠다고 하잖아.”

그가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그의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검사를 해본 결과 가족 중에서는 처제만이 이식 조건에 부합했다.

“내 살겠다고 어떻게 멀쩡한 배, 그것도 처녀의 배를 가르는 고통을 동생한테 겪게 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아내는 힘없이 웃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간경화가 심해 이틀에 한번 꼴로 복수를 빼내야 했다. 이식을 서둘러야 했지만, 기증자 순서를 기다리기에는 부지하세월이었고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동생한테 폐를 끼치기 싫다면 그럼 ‘사체 이식’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중국으로 빨리 가자고 그가 졸랐지만 그의 아내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중국은 아직 믿고 수술을 받을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며 내처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집은 병원비 감당을 두려워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형편은 넉넉하지가 못했다. 만일 이식을 받게 된다면 그 엄청난 수술비용으로 집이 거들날 거라는 사실을 그의 아내는 잘 알고 있었다. 건강해진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도 않는데 그런 고비용의 수술을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받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할 짓이 아니라고 그녀는 여겼던 것이다.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얼마 뒤 그의 아내는 예상보다 일찍 병상에서 죽고 말았다.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그녀는 기어이 남편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시신마저 병원에 기증해버렸다. 의학연구발전 해부용으로 쓰이는 조건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이처럼 마지막까지 선행을 베풀며 항상 남을 배려했던 착한 아내를 기어이 떠나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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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죽자 그 친구는 자신도 또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결심을 하게 되죠. 마치 열부가 1년 상을 치르듯, 해부용 실습이 끝나 화장을 하는 그날까지 아내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밤마다 찾아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주기로 말입니다.”

사내가 턱을 들어 병원을 가리키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 친구, 퇴근만 하면 저곳으로 달려가 아내의 영혼과 함께 밤을 보내죠. 이제 해부도 끝났고, 내일이면 화장을 하는 날이랍니다.”

이렇게 말한 사내는 자신의 잔을 들어 남아 있던 생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사내가 계산대를 거쳐 출입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사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A의 표정에는 이미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충격을 받은 듯한 A가 조금 전의 사내처럼 자신의 조끼를 단숨에 비우더니 말했다.

“저 치의 말, 자신의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본인의 이야기겠지?”

그러자 B 또한 감동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잔을 비웠다. 하지만 나는 술을 그대로 남겨놓은 채 잠자코 일어섰다.

이날, 나는 집에 들어가면서 뜬금없이 장미꽃 한 묶음을 샀다. 아내한테 모처럼 선물로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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