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백악관 만찬의 흥을 돋우기 위해 미국과 중국에서 각각 대표 연주자를 동원했다. 미국 측에서는 재즈의 전설 허비 행콕이, 중국 측에서는 28살의 젊은 피아니스트 랑랑이 뽑혀 나왔다. 이 자리에서 랑랑은 1956년에 나온 중국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 ‘나의 조국(我的 祖國)’을 연주했다. 랑랑은 ‘중국인들은 자부심이 매우 강하며 이 노래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백악관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자신이 선곡했음을 밝혔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며 그래서 ‘모르는 게 약(藥)’일 때가 많다. 만약 이 노래가 무엇을 노래하는지를 그 즉시 알았다면 만찬의 호스트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음식을 목에 제대로 넘길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아무리 백악관의 퍼스트레이디 미셀 오바마가 정성을 다하고 거금 50만 달러를 들여 차린 비싸고 진귀하고 맛있는 요리라도 그러하다.

반대로 이 곡을 알고 귀가 번쩍 뜨였을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측 참석자들은 마음 편하고 뿌듯했을까 궁금하다. 이 곡이 ‘인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단결을 이끌어내어 그들의 통치 목적 달성을 위해 권장돼온 노래이기 때문이다. 북경 올림픽에서도 이 노래가 연주됐고 주요 행사 때마다 이 곡은 등장한다.
‘강대한 조국이여/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모든 곳이 평화와 햇볕으로 가득하네….’ 노래는 이렇게 ‘조국’의 찬미로 시작되지만 전체의 의미는 영화에서 늑대로 표현되는 미국을 향한 ‘항미 반미(抗美 反美)’의 노래다.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의리’의 노래다.

이런 적개심 가득한 노래를 당사국의 심장부인 대통령 관저의 만좌중(滿座中)에서 보란 듯이 연주했다. 뱃속에 칼을 품었거나 간계(奸計)가 있어도 웃어야 하고 상대를 자극하거나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할 외교 무대에서, 더구나 허심탄회하고 유쾌해야 할 정상의 만찬 자리에서 말이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무례다. 이렇게 공격적일 수가 있나. 중국은 이런 나라인가. 미국과 함께 세계 G2의 경제대국인 중국이 급기야 군사대국으로까지 굴기(崛起)했을 때 과연 어떤 나라가 돼있을지 소름 돋게 해주지 않는가.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빈틈없이 준비돼야 하는 정상 외교 무대에서 벌어진 이런 일을 ‘불찰(不察)’이라거나 우연한 실수로 보아 넘기기는 어려울 것 아닌가. 후진타오가 보따리를 푼 450억 달러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선물에 기분 좋았던 미국은 뒤늦게 뒷머리를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낭중지추(囊中之錐),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호주머니 속의 송곳’ 같이 중국의 숨은 속마음이 드러난 것인가.

영화 상감령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활약상을 과장되게 미화해 제작된 영상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의 선전·선동 도구로 활용돼 왔다.

상감령은 휴전협상을 앞두고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 남쪽의 저격능선(Sniper Ridge)과 삼각고지 사이의 한 고개 이름이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43일간의 밀고 밀리는 전투가 벌어졌었다. 그들은 이 전투를 상감령 대첩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크게 승리한 전투라고 평가한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유엔군 측의 가공할 포격과 폭격에 맞서 최소한 5m 깊이의 갱도식 땅굴을 전 전선에 걸쳐 팠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287km, 그들은 이를 ‘지하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랑랑이 백악관에서 연주한 ‘나의 조국’은 영화 속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이 땅굴 안에서 부른 노래다. 영화에서 인민해방군은 이 땅굴에서 기관총과 총격을 퍼부어 진격해 들어오는 늑대들(미군)을 무참히 쓰러뜨리고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실제의 상감령 전투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무려 1만 5000여 명이나 죽었다. 그나마 땅굴 덕분에 이 정도 피해에 그쳤을 것이다. 한국군도 5000여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참으로 처절한 격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런 전투를 그들은 승전의 대첩이라고 과장되게 영화로 미화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압도적인 유엔군 측의 화력 앞에서 그들의 거점을 다 내주지 않고 지켜낸 것만도 승리라고 여길 수 있다. 지금도 파들어 오는지는 모르지만 북한의 땅굴 파는 기술과 전술은 그때 그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오바마 후진타오 간의 회담 결과를 놓고 ‘드디어 미중 두 나라가 쪽수는 달라도 같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같은 책만 읽으면 뭐하나. 같은 책을 읽더라도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책에서 배운 것을 같은 방향으로 실천하며 나아가야지 책을 읽는 목적과 의도가 다르고 같은 책을 읽었지만 깨치고 배운 것이 다르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동물에 따라 같은 풀과 이슬을 먹어도 젖을 만들기도 하고 독을 만들기도 하듯이 아웃 풋(Out-put)이 다르게 나타난다면 같은 책을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후진타오는 ‘구동 존이(求同 存異), 같은 것은 추구하지만 다른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정작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중국은 미국과 다르며 달리 행동할 수 있다는 존이(存異)가 아닌가. 한반도 문제에서 그들의 견해는 첨예하게 달랐다. 그래서 어중간한 절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사코 동맹 북한을 감싸고도는 중국의 완강함에 끌려간 절충이었다.

중국은 지나치게 북한 편향적이며 우리의 맹방인 미국은 한국에 철석(鐵石)같지가 않았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불만족스러운 논의에 일희일비해야 하는가. 언제 우리 문제에서 우리가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생각이 미치면 랑랑이 백악관에서 저지른 무례는 오히려 하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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