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사진제공 익산시·국립부여박물관

부여 궁남지
부여 궁남지

백제 왕도 사탁부와 서동

무왕 출생 설화를 보면 부여 궁남지에서 살았던 과부가 용(龍)을 만나 무왕을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궁남지는 백제 왕궁에서 남쪽으로 대로를 따라 갈 수 있는 남쪽 궁원이다. 이 설화에서 용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으로 보인다. 중국 측 사서에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됐다.

왜 서동은 위덕왕의 아들이면서 익산에 내려가 몸을 숨긴 것일까. 그것은 궁남지에 살았던 어머니가 귀한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위덕왕의 장자들이 왕위에 오르자 서동은 몸을 피해 익산에 숨어 마를 캐며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동이 장성한 후 자신이 태어난 부여 궁남지를 돌아보던 중 인근에 사탁씨가 집단으로 살았던 내지성에서 아름다운 선화공주를 본 것이 아닐까. 당시 신라와 백제는 성왕 전사 이후 숙원관계였기 때문에 서라벌에 잠입해 공주를 데리고 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왕권 다툼 중 사탁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적덕은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서동의 출현을 반겨 사랑하는 딸을 익산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권력을 보전하기 위한 ‘보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라 왕족의 후손들이 살던 부여 사탁부에서 아름다운 신부를 데리고 왔으니 그녀는 사탁의 따님 혹은 신라공주로 불렸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당시 궁성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위덕왕이 죽은 후 즉위한 법왕, 혜왕은 즉위 후 3년을 채우지 못했다. 당시 부여 왕궁에서의 정변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혜왕이 즉위 1년 만에 왕위를 잃자 후계가 없었다. 이때 익산에 숨어살던 무왕이 자연스럽게 왕위 계승자가 된 것이다.

무왕은 경제력과 더불어 백제 왕실에 영향력이 있었던 사탁 세력의 뒷받침을 받았을 것으로 상정된다. 때문에 왕위에 오른 후 숨어 살았던 사자산 아래에 왕비의 정재(淨財)로 대가람을 창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은 익산을 별도(別都)로 삼아 왕궁리에 궁성을 짓기까지 했다.

무왕은 즉위 후에 자신이 태어난 곳, 궁남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정비했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에 “무왕 35년(634)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39년(638) 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금슬을 짐작할 수 있다.

사택지적비
사택지적비

미륵사지 석탑 올해 안에 복원 끝나

동양 최대로 지칭되는 미륵사지의 가람 배치는 돌로 된 동탑(東塔)과 서탑(西塔), 가운데 목탑(木塔)이 세워졌던 삼탑, 삼금당 형식을 보여 준다. 각 탑의 뒤에 웅장하고 미려한 금당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러한 가람 배치는 고대 가람 연구에서 조사된 적이 없는 형식이다. 또 이들 탑과 금당을 연결하는 긴 회랑(回廊)이 있는데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으로 구분한 삼원식(三院式) 형태를 보여준다.

여러 차례 발굴 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를 주로 하여 총 6500여 점이나 된다. 삼국의 기와 중 가장 아름다운 백제시대에서부터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의 연화문 기와가 수습되었으며 이 가운데 백제 녹유연화문연목와(綠釉蓮花文椽木瓦)가 주목을 받았다.

와당은 백제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써 단판 연화문이 주류를 이룬다. 이 가운데 연판에 가벼운 선 무늬가 가미된 것도 있다. 백제 말기 시대의 흐름을 짐작하게 해준다. 명문 기와로는 ‘彌勒寺’ ‘國五年庚辰’ ‘姚奉院’ ‘至元四年’ ‘天曆三年’ 등이 찾아져 향화(香火)가 고려시대까지 올려졌음을 알수 있다.

미륵사지 정비 발굴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백제 최고의 석탑 복원이었다. 약 1세기나 시멘트 벽에 몸을 기댄 채 한을 안고 있던 석탑이 올해 안에 완전 복원된다. 1998년 보수 정비를 시작한 지 20여 년 만에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미륵사지 백제 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 되었다. 양식은 부여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오층석탑과 비교되며 구조가 백제 시대 유행했던 목탑과 유사하다. 마치 나무를 깎아 짜 맞춘듯 결구하여 쌓았다. 백제 목탑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석탑을 통해 백제 잔영을 상정하는 것은 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미륵사지 연꽃무늬 서까래 막새
미륵사지 연꽃무늬 서까래 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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