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사진제공 익산시·국립부여박물관 

‘사탁부속 장지일(沙涿部屬 長池馹)’이란 통일신라 대의 명문 기와편
‘사탁부속 장지일(沙涿部屬 長池馹)’이란 통일신라 대의 명문 기와편

사탁적덕과 왕비

이 명문을 대한 역사학자들은 백가쟁명 했다. 많은 학자들은 ‘사탁적덕’을 <일본서기>나 부여에서 발견돼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관된 사택지적비와 연계하여 백제 8대 성씨의 하나로 해석했다. 백제 8대 성은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다.

8대 성씨 중 하나인 ‘사씨’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東城王) 6년(484)조다. 여기에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가 나온다.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4년(543) 기록에는 사탁기루(己婁)라는 사람이 상좌평으로 기록돼 있으며, 백제 멸망 시기 기사에 자주 보인다. 또 제명천황(齊明天皇) 6년(660) 7월 조에는 당나라 포로가 된 백제인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대좌평(大佐平) 사택천복(沙宅千福)이 맨 처음 등장한다. 사택천복은 부여시내 정림사 5층 석탑 면석에 유인원의 부여 정벌을 기념해 새긴 명문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바로 부여 관북리에서 1948년 고(故)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이 발견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다. 654년(의자왕 14) 화강암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높이 109㎝, 너비 36㎝, 두께 28㎝의 크기다. 원래 석비(石碑)에서 파괴되고 남은 잔비(殘碑)의 형태를 보이며, 양질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해 그 안에 정연한 글자를 음각했다. 글자는 1행 14자로 모두 56자가 확인됐다. 육조시대 유행했던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로써 자체(字體)는 품격 있는 구양순체(歐陽詢體)다.

“甲寅年正月九日 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悲貌 含聖明以□□”

“갑인년 정월 9일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높고 큰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아아한 슬픈 모습은 성명을 머금어 □□을 한 듯하다.”

즉 ‘사택지적’이란 사람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 불교에 귀의하여 보화를 투입해 사찰을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우측면 상부에는 봉황문을 음각했고 붉게 주칠(朱漆)한 흔적이 보인다. 이 비석을 조성했을 당시 백제의 시문(詩文)에 대한 수준 높은 문화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 비석이 발견된 장소가 왕궁이 자리 잡았던 구 부여박물관 터인 점을 감안하면 ‘사탁’은 백제 왕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탁씨 일가들은 궁성 가까운 곳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탁적덕 비문에 등장하는 ‘내지성(奈祇城)’을 현재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내지’는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왕성과 그리 멀지 않은 부여 시가지 인근에 사탁씨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미륵사지 석탑 복원 전 사진
미륵사지 석탑 복원 전 사진

사탁은 강력한 신라 도래 집단

‘사택(沙宅)’을 사씨(沙氏)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택은 ‘사택씨(沙宅)’로 봐야 하며 이는 신라 6부의 하나였던 사탁(沙啄) 혹은 사택(沙宅)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사탁’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찾아진다. 사탁부(沙啄部)는 신라 6부 가운데 하나로, 사량부(沙梁部) 혹은 사훼부(沙喙部)라고도 불렸다. 6부 가운데 핵심적인 집단이었다.

지증왕 이후 신라 왕은 사탁부에서 나왔으며 사탁부의 장은 갈문왕(葛文王)으로 불렸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등이 모두 사탁부(沙啄部) 출신이다. 사탁부 사람들이 신라왕경에서 지방으로 집단 이주한 사례는 685년(신문왕 5년) <신라본기> 기사가 가장 정확하다. 청주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된 곳으로 지난 70년대 필자에 의해 상당산성 공남문(控南門) 아래 건물지에서 ‘사탁부속 장지일(沙涿部屬 長池馹)’이란 통일신라 대의 명문 기와편이 찾아진 바 있다.(沙涿部銘 平瓦에 대한 小考. 이재준. 서원학보 1981. 12. 31) 이는 경주 사탁부 호족의 지방 이주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 유물이며, 이곳에 살던 사탁부 귀족들이 사탁씨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집단 이주지역이 성씨로 불리게 된 것은 국원경(國原京)의 고지인 충북 충주에서도 찾아진다. 충주는 본래 임나라가(任那加羅,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로 불렸는데, 이는 진흥왕대 가야 세력의 집단 이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살던 문장가 강수를 신라 사람들은 ‘임 강수(任强首)’로 지칭했다. 

493년 3월 백제 동성왕은 고구려 남하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자진하여 신라왕의 사위가 되고자 했다. 이때 소지왕(炤智王)은 동성왕에게 왕족 등급인 아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아찬 비지는 사탁부에 살았던 소지왕의 혈육으로 추정된다. 신라왕은 왕녀를 시집보내면서 100명이 넘는 시종을 딸려 보냈다. 이 신라의 아찬 비지 사탁 세력이 동성왕의 비가 됨으로써 백제의 새로운 귀족 계급으로 부상하게 됐다.

이들은 동성왕의 아들 무령왕과 성왕의 비호를 받았으며 후손들은 당대 수상급인 좌평(佐平)에 오를 수 있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특히 성왕이 사비로 천도했을 즈음은 비지세력이 백제로 이주한 지 45년 뒤였으므로 그 세력의 확산을 가늠할 수 있다. 사탁적덕이 있던 성이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내지’성으로 불렸던 것도 그 세력이 견고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