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반복되는 역사 성균관의 ‘항의’
[이재준 문화칼럼] 반복되는 역사 성균관의 ‘항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오늘날 대학의 전신인 조선 성균관의 ‘공관(空館)’은 일종의 스트라이크(strike)였다. 성균 유생들이 임금의 처사에 반발해 대학을 떠나는 것을 이같이 표현했다. 공관은 임금이 부당한 인사를 단행했을 때에도 이루어졌다. 합당하지 않은 인물을 요직에 등용하면 유생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성균관을 비운 것이다.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는 세종 때에도 성균관의 스트라이크가 있었다. 바로 궁중 안에 내불당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임금은 유생들의 공관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영의정 황희를 보내 유생들을 회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생들은 처음 의사를 굽히지 않았지만 존경하는 재상의 회유로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왔다. 

중종때 공관은 중전 신씨(단경왕후)를 폐위하면서 일어났다. 유생들은 지금의 대한문 앞으로 나가 엎드려 연좌농성을 벌이고 임금의 비답(批答)을 기다렸다. 비답이 늦어지고 나졸들이 강제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생겨 많은 유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광해군 시절 성균관의 공관사태는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전횡에서 비롯됐다. 이이첨은 성균유생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출신 성분도 미약했고 광해군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잡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이첨은 인물이 준수했다고 한다. ‘송천필담(松泉筆談)’에 재미난 일화가 기록된다. 그가 함경 감사로 부임하면서 수레를 타고 만세교(萬歲橋)를 건넜다. 그런데 안에서 책만 보며 바깥 경치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감영 기생들이 심임감사의 얼굴을 보고는 신선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늙은 기생 하나가 다른 인물평을 했다. 

-만세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경치이다. 누구든 처음 보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사람의 정리가 아니다. 그는 성인이 아니면 소인일 것이다-

이이첨은 사람을 상대할 때는 시선이 얼굴 위로 올라오는 법이 없었고, 말할 때는 웅얼거렸다(視不上於面, 言若不出口)고 한다. 그런데 그를 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사전에 그 인물됨을 알아왔다. ‘한 세상을 그르치며,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재앙을 가져올 자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백사는 이이첨의 정적이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 했을 때 반대를 한 백사를 제일먼저 제거하려 한다. 백사를 함흥에 귀양 보낸 것도 이이첨이다. 광해는 자신을 왕으로 등극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이이첨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백사를 귀양 보내 죽음에 이르게 한 무리수는 나중 인조반정의 도화선이 됐다. 

이이첨은 성균 유생들의 최고 존경 대상이었던 이이(李珥)의 문묘배향마저 반대했다. 율곡이 서인과 학맥을 같이했다고 비판하며 학문과 인격을 폄훼했다. 성균 유생들은 이이첨의 횡포에 저항, 공관을 단행했다. 임금이 회유했지만 유생들은 임금의 처사를 비난하고 이이첨의 파직을 요구했다. 

이이첨의 권력 농단과 비행을 조모조목 적어 상소했다. 광해는 이이첨의 파직 기회를 놓치고 그를 옹호하려다 급기야는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은 의혹이 많은 조국 법무장관을 임명하여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서울대, 고대, 연대 대학생들도 캠퍼스를 나와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급기야 대학교수 3천명이 정의와 상반되는 법무장관을 파면시키라고 시국선언을 했다. 유교사회 ‘공관’의 역사를 보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학가까지 합세한 진정한 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만과 독선이 하늘을 찌른다는 국민여론이 팽배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