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전현직 대학교수 3400여명이 조국 법무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웬만해선 집단행동에 잘 나서지 않는 교수들이다. 게다가 조국 장관이 이미 임명된 상황에서도 대규모 시국선언에 나선 것은 아주 이례적이다. 진짜 그 규모가 맞느냐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때의 2200여명보다 훨씬 많다. 이마저 보수진영 교수들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설사 보수성향의 교수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조국 사태’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를 조사한 결과가 19일 발표됐다. 결과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지난주보다 3.4%포인트 내린 43.8%에 불과했다. 리얼미터 조사 기준으로 보면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취임 후 최저치다. 반대로 국정수행 부정평가는 3.0%포인트 오른 53.0%로 이 또한 취임 후 최고치다. 그리고 긍정평가와 부정평가의 격차는 오차범위(±2.2%포인트) 밖인 9.2%포인트로 벌어졌다. 문 대통령 취임 후 ‘최악’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의미다. 교수들의 시국선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여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소모적일만큼 반복되는 여야 정치공방의 핵심은 역시 조국 법무장관과 그의 일가에 대한 국민적 불신 때문이다. 일단 장관으로 임명되면 잠잠해지려니 했지만 연일 검찰에서 흘러나오는 조국 장관 일가의 행태를 보노라면 불신을 넘어 분노에 가까울 만큼 여론은 냉랭하다.

단지 여론의 ‘추이’만이 아니다. 여론을 타고 흐르는 사태에 대한 ‘질적 담론’은 더 심각하다. 집과 연구실의 컴퓨터를 빼돌리고 표창장까지 위조했다는 조 장관 아내는 교수 신분으로 어디서 그런 방법을 배웠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입을 맞추고 함께 해외로 나갔던 사모펀드 관계자들의 언행은 한 편의 범죄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외고에서 고려대 자연계열로 진학하고, 내친김에 부산대 의전원까지 이렇다 할 필기시험도 없이 패스한 조 장관 딸의 ‘스펙’을 보노라면 ‘그들만의 리그’를 생생히 보는 듯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컵밥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열심히 공부하는 이 땅의 아들딸을 보면서 못나고 무력한 부모들은 어떤 심정일까. 문재인 정부를 또 어떻게 보고 있을까. 참담한 심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삭발을 했다. 그 뒤를 이어 줄줄이 삭발 릴레이가 펼쳐지고 있다. 조국 장관을 반드시 끌어 내리겠다는 결연함의 의미일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여전히 조국 장관에 부정적인만큼 제1야당의 투쟁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그 투쟁 강도가 셀수록 내부의 지지층 결집에 도움이 될 것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자유한국당 바깥에서는 그다지 공감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투쟁 방식도 진부할뿐더러 그들의 진정성도 그다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을 정도로 조국 장관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면 먼저 인사청문회에서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이 순서였다. 당초의 합의대로 이틀간 날을 정해서 핵심 증인들을 불러내고 철저하게 따졌어야 했다. 그것은 자유한국당 만이 할 수 있는 국회의 권한이며 의무였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정쟁’으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맹탕’으로 청문회 절차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건 무능이 아니라 ‘배신’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뒤늦게 너도나도 삭발을 하고 조국 장관 사퇴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조 장관 임명에 대해 머리를 깎을 정도라면 그 결과를 자초한 자유한국당 원내지도부와 인사청문위원들부터 사죄하고 사퇴하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조국 일가에 대한 분노와 배신에 머리를 깎을 정도의 ‘상식’이 있다면 지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대해서는 왜 분노하지 않았던가. 조 장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었다. 그 때는 같은 편이라서 침묵하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감쌌던 것인가. 헌정사상 초유의 헌정질서 문란에 대해서 머리를 깎거나 책임을 진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럼에도 그 때는 어물쩍 숨죽여 있다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마침 여권의 ‘약한 고리’가 불거지자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양 너도나도 삭발 대열에 나서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떤 비장함보다는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거기서 무슨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곧 있을 공천용, 또는 총선용 공보사진을 미리 찍어두는 듯한 느낌이라면 너무 독한 비평일까.

냉정하게 보자면 조국 장관을 결국 임명에 이르도록 동력이 돼 준 것은 역설적으로 자유한국당의 ‘무능’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하더라도 자유한국당의 비판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마디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래도 반대, 저래도 반대할 정당인데 굳이 자유한국당의 손을 들어 줄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조국 장관 임명 후에 여론이 불리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그 여론이 자유한국당 지지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국민의 신뢰를 받는 야당이 있었다면 문 대통령이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할 수 있었을까. 강력한 ‘대안야당’이 있어서 자칫 레임덕으로 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면 조국 장관 임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따라서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또 ‘그 때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제1야당은 문 대통령 고민의 큰 변수가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무능한 야당의 존재가 오만한 여권을 만드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그 둘은 서로 연결돼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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