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금동관이 찾아진 화성 향남 일대 유적 백제-마한 통합 역사의 ‘타임캡슐’ (2)
[다시 쓰는 백제사] 금동관이 찾아진 화성 향남 일대 유적 백제-마한 통합 역사의 ‘타임캡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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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화성시청·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길성리 토성 인근 논과 저수지
길성리 토성 인근 논과 저수지

백제 근초고왕, 가장 강성했던 영주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국력이 가장 강성했다. 재미있게도 왕은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 왕도는 어디였을까. 이 문제는 또 숙제로 남는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백제는 충청·전라도에 이르는 마한 구 영역과 말갈이 내려와 살던 강원·황해도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며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왕은 또 고구려의 남평양을 공격, 고국원왕을 죽여 기세를 꺾었으며 왕도 한성을 굳건하게 했다.

이 시기 백제는 남쪽 마한의 거점에 지방관인 담로를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담로는 왕족이나 귀족을 현지에 파견하여 관리한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다. 담로는 원래 백제어 ‘다라’ ‘드르’의 음차(音借)로써 ‘성(城)’을 의미한다.

중국 고대 사서인 <양서(梁書)> 백제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있었다’라고 기록돼있다. 백제왕이 신하를 왕이나 후(侯)에 봉한 기사와 연관시켜 봉건영지(封建領地)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담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계속 시행됐으나, 백제의 사비천도 전후 지방조직을 5방(方) 1군제(郡制)로 정비하면서 이에 흡수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길성리 토성의 경우도 이 시기 확립된 담로제도에 의해 한성에서 파견된 왕족이 다스렸을 치소로 추정하는 것이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통전(通典)>에는 ‘동진(東晋) 시대에 백제가 북평(北平, 베이징)과 유성(柳城, 중국 랴오닝 성)을 영유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양서(梁書)>에는 ‘백제가 요서와 진평을 차지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백제의 국력이 바다 건너 중국 대륙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은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근초고왕은 문예중흥에도 힘써 고흥(高興)에게 백제의 사적을 정리하여 <서기(書記)>를 편찬토록 했다. 박사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비롯한 경(經)과 사(史)를 전해주었다. 만약 왕인박사가 한자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그만큼 늦어졌을 게다. 백제 근초고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로워져야 하는 점이 여기에 있다. 일본 아스카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 공헌한 왕인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소상히 기록됐다.

백제는 또 일본에 철기 제련 기술을 가르쳤다. 일본의 철기 수입국이 바로 백제였다. 일본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칠지도(七支刀)도 근초고왕 시기 왜 왕에게 전해진 유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화성시청 전경
화성시청 전경

화성은 마한 땅

화성은 마한의 고지(故址)다. 이 지역 고대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마한 3개국이 화성에 있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양국’은 지금의 충북 청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어 보다 확대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른 사료에는 원양국이 ‘애양국(愛襄國)’으로 표기돼 있어 청주 부모산(애양산 혹은 아양산) 지역의 대규모 마한 백제 초기 유적을 유력한 후보지로 점친다.

‘모수국’으로 보는 견해는 어문학적으로 화성이 고구려 시기 ‘매홀(買忽)’로 불렸기 때문이다. 모수국(牟水國)의 모(牟)가 중국 측의 표기라면, 매홀군(買忽郡)의 매(買)는 우리 측의 표기다. 즉 ‘모홀’ ‘모곡’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마한은 어떤 나라였을까. 중국 측 사서 <마한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거(居)하고, 성곽이 없다. 무릇 작은 나라가 56개국이다. 큰 나라는 만호를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를 거느린다. 각각 거수(渠帥)가 있다. 풍속은 그 기강이 흐리고, 꿇어 앉아 절하는 예는 없다. 소와 말을 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쌓아 올리는 것으로 장사지낸다. 풍속에 금은 비단을 중히 여기지 않고, 옥구슬을 귀히 여긴다. 옥구슬을 사용하여 옷에 꿰매고, 머리를 장식하고, 귀걸이를 한다.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드러내놓고, 옷은 베옷에 솜을 넣었다. 풀을 엮어 신을 신고, 성질은 용감하고 사납다. 나라에 조역이 있어 성을 쌓고 해자(垓子)를 파는 일이 일어나면 용감하고 강한 어린 소년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로 꿰어 지팡이에 줄을 묶어 종일 힘을 들여 소리치지만 아파하지 않는다. 활과 방패, 창과 망루를 사용하고 비록 전쟁 때 공격하더라도 서로 굴복함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기록을 보면 마한은 처음에 성을 쌓지 않고 강이나 바다에 연한 언덕(丘陵)에 혼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성이나 목책(木柵)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철기로 무장한 북방계통의 세력이 내려오기 시작한 후부터로 상정된다. 그 세력은 고구려 개국 초기 왕권 다툼에서 밀린 소서노와 온조, 비류 집단이었다.

고구려에서 망명한 이들은 처음에는 마한 연맹체의 한 구성원이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마한 54개국 중 하나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백제는 마한 동북방 땅 일부를 얻어 나라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온조는 처음 마한 종주국인 목지국(目支國, 지금의 천안으로 비정)에 신록(神鹿)을 보내거나 전쟁 포로를 바치는 등 조공의 예를 취했다.

공격적인 온조는 군비를 확장하여 주위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했다. 온조왕대 마한과의 충돌과 점령 기사는 이 같은 사실을 입증시켜준다. 그 후 영주 근초고왕대에는 세력 범위를 경기도 유역에서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했다. 위례성 백제 치자들은 왕도에서 가까운 화성의 중요성을 감안, 길성리 등지에 대규모 성을 쌓고 담로를 배치해 이 지역을 통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길성리 백제 세력은 5세기 후반 장수왕대 개로왕의 전사 이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이로부터 약 90년 후 신라 진흥왕의 한강유역 진출 시기, 이 지역은 나·제 간 치열한 접전지역이 됐으며 결국은 신라에 병합됐다. 길성리와 인근 많은 토성과 고분들이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준다.

화성 전곡항
화성 전곡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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